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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였어"…전쟁터에 아들 보냈던 어머니 절규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3-07 01:23   수정 2026-03-07 06:58


“아드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습니다.

1914년 독일 베를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두 달 만에 사랑하는 열여덟 살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습니다. ‘내가 죽인 거야.’ 미성년자였던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입대 동의서에 서명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케테 콜비츠(1867~1945). 오늘날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판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름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전쟁에 빼앗기고, 자책과 슬픔에 시달리다가, 가장 처절하게 반전(反戰)을 외쳤던 예술가. 그녀의 삶과 예술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케테는 1867년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베를린과 뮌헨에서 유학하며 판화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붓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온몸으로 판을 깎아내고 찍어내는 판화가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에 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어느 날, 케테는 의사 카를 콜비츠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891년 결혼한 부부는 베를린 북부의 가난한 노동자 거주지에 정착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둘은 가치관이 꼭 닮은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카를은 아픈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의사가 됐고, 케테는 남편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893년 발표한 ‘직조공의 봉기’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독일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어 과거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발표한 ‘농민 전쟁’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케테는 ‘사회의 밑바닥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가정도 행복했습니다. 1892년 장남 한스가, 1896년 차남 페터가 태어났습니다. 케테는 특히 페터를 아꼈습니다. “맑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케테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페터가 일곱 살이던 19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케테는 페터를 품에 안고 거울 앞에 앉아 에칭(금속판에 이미지를 새겨 넣는 판화 기법)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품 제목은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작업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케테가 한숨을 내쉬자, 품 안의 어린 페터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속삭였습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이것도 예쁘게 완성될 거예요.” 케테는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습니다. 훗날 자신과 아들의 모습이 이 그림 속 비극과 똑같아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머니의 서명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은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독일 전역은 애국주의 열풍으로 들끓었습니다. 열여덟 살이 된 페터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들과 함께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다만 페터는 미성년자였기에,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였던 남편 카를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에게 전쟁터는 그저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케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어머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뢰'라고 믿었습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었습니다. 결국 케테는 동의서에 서명했고, 페터는 벨기에 플랑드르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아들을 보낸 직후부터 케테는 후회에 사로잡혔습니다. 일기에 썼습니다. "울고 또 울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미친 짓이다." 예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1914년 10월 22일 밤, 페터는 참전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전사했습니다. 부대에서 가장 먼저 쓰러진 병사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케테는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들은 배신당했다." 훗날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쟁을 부추긴 국가와 사회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케테가 생각하는 가장 큰 배신자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남편의 반대를 꺾고 입대 서류에 서명한 사람, 아들을 죽을 곳으로 보낸 결정적인 범인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요.

이 시기 케테의 작품에 보이는 날카로운 선들은 마치 자식 잃은 어머니가 제 마음을 깎아낸 흔적 같습니다. 케테는 일기장에 썼습니다. "작업을 하려면 단단해져야 한다. 자신이 겪은 것을 바깥으로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18년간의 애도
아들이 죽은 지 두 달 뒤인 1914년 12월, 케테는 추모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밤 페터를 위한 기념비 구상을 떠올렸다. 언덕 위,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야 한다. 페터가 길게 누워 있고, 머리맡에는 아버지가, 발치에는 어머니가 있는 형상."

하지만 자식을 잃은 그 거대한 슬픔을 손에 잡히는 형태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구도가 바뀌고, 형태가 바뀌고, 방향이 뒤집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1915년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받쳐 안은 모습을, 1917년에는 묘지 입구에 세울 부조를, 1924년에는 무릎 꿇은 거대한 조각상을…. 여러 시도 끝에 남은 것은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케테 자신을, 아버지의 얼굴은 남편 카를을 모델로 했습니다. 아들을 가슴속에 묻고 묘비를 세우는 데 18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도 삶은 계속됐습니다. 1919년, 콜비츠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교수로 선출됐습니다. 1921년에는 장남 한스에게서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죽은 둘째를 쏙 빼닮은 아이였습니다. 케테는 그 아이에게 둘째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습니다. 페터. "따뜻한 작은 발로 나를 차고,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온갖 소리를 내는 아이." 케테는 손자를 끔찍이 아꼈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비극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케테의 삶은 다시 휘청였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던 그녀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고, 작품 전시도 금지됐습니다. 고립과 감시 속에서도 그녀는 외쳤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죽게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세계대전은 또다시 터졌습니다. 1942년 10월 14일, 장남 한스가 말없이 케테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어두운 표정만 보고도 케테는 직감했습니다. 손자 페터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28년 전의 악몽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같은 이름, 다른 전쟁,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일흔다섯 살의 케테는 이번엔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판화를 제작했습니다. 제목은 '갈려서는 안 될 씨앗'. 괴테의 소설에서 따온 제목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전쟁터라는 맷돌에 넣고 갈지 마라.” 어머니로서, 그리고 평생을 전쟁과 싸워온 예술가로서의 피 끓는 외침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안부를
1943년 베를린의 집이 폭격으로 무너졌습니다. 50년 넘게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함께한 공간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소중한 이들의 편지와 유품도 모두 불탔습니다. 케테의 생명도 급격히 시들어갔습니다. 이듬해 겨울, 눈이 어두워진 케테 앞에 손녀 유타가 목탄과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케테는 한참 동안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목탄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니, 더 이상 작업하지 않겠다. 2류 작품은 남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생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가다운 결정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 케테는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짧고 다정했습니다. "모두에게 안부를." 그녀가 죽고 8일 뒤 히틀러는 자살했고, 얼마 후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케테 콜비츠는 세상을 떠나기 전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든 전쟁은 이미 그 안에 또다른 전쟁을 품고 있다. 모든 전쟁은 다음 전쟁을 낳고, 모든 것이 박살 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이 광기의 근본적 종식을 온 마음으로 원한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이상이 솟아오를 것이고, 모든 전쟁은 끝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하며 죽는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포성이 울리는 지금, 수많은 '페터'들이 전장으로 끌려 나가고, 수많은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는 80년이 지난 오늘도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담은 씨앗들을, 기어이 전쟁이라는 맷돌에 갈아 넣을 셈이냐고.


모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i>**이번 기사는 《The Diary and Letters of Kaethe Kollwitz》(한스 콜비츠(장남) 편집, 1988), 《Kathe Kollwitz》(오토 나겔 지음, 1971)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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