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제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와 국민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법안들이 사법부와 사회 각계의 우려 표명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공론화와 제도 개편의 부작용에 대한 숙의 없이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현 상황에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
전국 법원장 43명은 지난달 25일 대법원에 모여 국회 본회의에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예정됐던 법왜곡죄·재판소원제·대법관 증원 법안 등에 대한 이례적인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 같은 사법부의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해당 법안들에 대한 소수당의 필리버스터마저도 "천준호 의원 등 162인으로부터 무제한토론 종결동의가 제출되었다"라는 안내와 함께 시작 24시간 만에 다수당 표결로 강제 종결됐다. 해당 법안들은 국회 문턱을 넘어 이달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이처럼 법안 심사부터 본회의 상정에 이르기까지 숙의 과정이 사실상 생략된 채 필리버스터마저 다수결로 종결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8일 한경닷컴이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실을 통해 국회사무처로부터 확보한 '18~22대 국회별 무제한 토론 신청 및 종결 현황' 자료에 따르면 22대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는 총 28건 진행됐다. 21대(5건)에 비해 5.6배 늘어난 수치다.필리버스터가 진행된 안건으로는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법왜곡죄'·'재판소원'·'대법관 증원' 외에도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하는 '노란봉투법'과 검찰청 폐지 등이 담긴 '정부조직법', 이사의 주주충실 의무 등을 담은 '상법' 등이 있었다.
이 중 안건의 85%에 달하는 24건이 더불어민주당의 종결 동의 표결을 통해 강제 종료됐다. 나머지 4건 중 3건은 임시국회 회기 종료에 따른 자동 종결이었고 1건은 토론자 부재에 따라 종결됐다. 이전 21대 국회에서도 회기 종료(3건)를 제외한 나머지 필리버스터(2건) 모두 민주당 주도로 강제 종료된 바 있다.
이러한 다수당의 '다수결 처리'는 부실 입법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사전 검증 장치가 없는 의원발의안 비중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유일한 여과 장치인 국회 내 숙의 과정마저 생략되고 있기 때문이다.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전체 발의 법안 중 의원발의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16대 국회 65.86%에서 22대 국회 93.69%로 역대 최고치를 찍고 있다. 반면 정부제출안 비율은 16대 23.73%에서 22대 2.77%까지 급감했다. 정부 입법은 법령 제·개정 시 파급 효과를 사전 분석하고, 입법예고를 통한 국민 의견 수렴과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등 최소한의 제어 장치를 거치는 반면 의원 입법은 이 같은 사전 별도 입법영향평가나 규제 검증 제도가 없다.
그럼에도 상임위 단계의 숙의 과정은 번번이 생략됐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기준 22대 국회 들어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안건을 표결 처리한 사례는 248건에 달한다. 직전 21대 국회(34건)와 비교해 7.29배 늘어난 수치다. 과거 18대(35건), 19대(6건), 20대(4건)와 비교해도 다수결에 의한 안건 처리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표결이 이뤄진 상임위는 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직을 맡은 곳에 집중됐다. 정청래·추미애 위원장의 법제사법위원회(162건)와 최민희 위원장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50건)가 특히 많았다. 이어 행정안전위원회(17건), 교육위원회(7건),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3건), 보건복지위원회(2건), 국토교통위원회(1건)가 뒤를 이었다.
소수 야당 내부에선 무기력감마저 감도는 분위기다. 법사위 소속 국민의힘 한 보좌진은 "다수결로 밀어붙이며 토론 기회조차 주지 않아 밤새 법안의 문제점을 분석한 자료를 만들어도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수당(민주당)이 회의 소집부터 의결, 본회의 표결까지 마음대로 주도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들러리만 서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제도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협의주의'란 국회법 입법 취지는 사라지고, 자구만으로 다수결을 정당화하는 현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민주당의 행위는 법적으로는 합법"이라면서도 "법을 만든 취지에는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어 "소수 의견을 제도에 담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고, 다수결은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다수당이 다수결이란 수단을 민주주의란 가치로 포장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도 현 상황에 대해 "민주적 국회라고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87년 민주화 이후 전면개정된 국회법의 핵심 취지는 교섭단체 간 협의, 즉 협의주의였다"며 "다수결은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조정되는 긴 과정의 끝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데 지금은 그 숙의 과정이 사라지고 법 자구대로만 밀어붙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정우 한경닷컴 기자 krse905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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