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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아버지는 인간쓰레기"...'유명 천재' 손녀가 고백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3-13 23:53   수정 2026-03-14 00:39


“제 할아버지는 흡혈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성들을 복종시키고, 길들이고, 매혹하고, 짓밟고, 버리면서 에너지를 얻었으니까요.”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는 2001년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한테 말버릇이 너무 심하다 싶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피카소가 만난 수많은 여성 중 대부분은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두 명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피카소 아들(마리나의 아버지)의 운명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 평생 피카소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운전기사이자 하인처럼 살았고, 피카소가 죽은 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생전 피카소의 인성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는 게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반면 현대미술 작가로서의 파블로 피카소는 미술계에서 신(神)과 같은 대접을 받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보통 화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며 한 사람 몫의 화풍을 갈고 닦습니다. 피카소는 열 사람 몫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노력하는 천재였던 그는, 하나의 화풍을 발명한 뒤 스스로 부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큐비즘(입체주의)은 현대미술의 역사 자체를 바꿔 놨습니다.

그렇게 92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피카소는 수만 점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열정과 에너지 덕분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에너지의 연료가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남자 피카소. 그의 열정과 천재성, 사악함과 무책임함,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그림들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피카소, 왜 위대하다는 거야?
피카소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겁니다. 대단한 천재 화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덕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왜 위대하다는 건지, 눈코입이 삐뚤빼뚤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얼굴 그림이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저작권 관리가 엄격해서 책이나 유튜브 같은 곳에서 이미지를 마음껏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겁니다(다행히 기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피카소의 화풍은 시기별로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것처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그림 한두 장만 가지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았고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피카소의 가장 특이한 점, 대단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평생에 걸쳐 걸고 닦은 화풍, 말하자면 자신만의 ‘무기’로 승부를 봅니다. 그런데 피카소는 어떤 무기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습니다. 사실적인 그림, 추상적인 그림, 아름다운 그림, 무서운 그림, 우아한 그림, 거친 그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낼 수 있는 화가였습니다. 우리가 한국어를 자유롭게 말하듯, 피카소는 그림이라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피카소 자신도 말했습니다. “나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말할 뿐이다.”

이런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미술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먼저 아버지와 관련된 에피소드. 어느날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자기가 그리다 만 그림을 완성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본 아버지는 자기 재능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물감과 붓을 모두 아들에게 넘겨주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네 살 때 미술 학교에 들어갈 때는 그림을 수년간 배운 학생들도 한 달이 걸리는 과제를 불과 하루 만에 마쳤다고 합니다. 그것도 최고의 완성도로.



피카소는 그야말로 타고난 화가였습니다. 10대에 이미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열네 살에 그린 ‘첫 영성체’는 지역 최고의 화가들이 총출동한 전시에 걸렸습니다. 피카소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12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 덕분에 그는 나중에 얼굴이 비뚤어지고 몸이 쪼개진 그림을 그린 뒤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이야. 일부러 이렇게 그린 거라고.” 제대로 된 기본기 없이 대충 그린 뒤 ‘이게 예술’이라고 하는, 일부 엉터리 화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단 얘깁니다.
청색, 그리고 장밋빛
바르셀로나 미술학교를 졸업한 피카소는 스페인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인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학교 수업은 그의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당시 세계 미술계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 “파리로 가자. 거기에 미래가 있다.” 열아홉 살의 청년 피카소는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피카소와 친구는 프랑스 출신의 여성 제르맹 가르갈로와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문제는 친구가 제르맹에게 반해버렸다는 것. 피카소는 일이 생겨 스페인으로 잠시 돌아갔지만, 친구는 계속 파리에 머물며 제르맹에게 열렬히 구애했습니다. 하지만 제르맹은 거절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르맹은 유부녀였으니까요. 그런데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친구는, 1901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스페인에 있던 피카소는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단 파리에 돌아온 피카소는 친구가 죽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화실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피카소는 제르맹과 연인이 됩니다. 절친한 친구가 사랑하다 죽은 여인과, 친구가 죽은 바로 그 장소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겁니다.

피카소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복잡한 감정 때문에 제르맹과의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이 시기부터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카사헤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했을 때, 푸른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는 거지와 매춘부 등 거리의 삶들이 차갑고 쓸쓸한 푸른빛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독한 인간들. 서로 부둥켜안은 남녀 한 쌍.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얼굴에는 죽은 친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훗날 이 시기 그림들은 ‘청색 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피카소 특유의 패턴이 처음으로 드러납니다. 자기 욕망에 지극히 충실하다는 것. 타인의 감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욕망과 죄책감이 예술적 동력이 된다는 것. 이 패턴은 이후 평생 반복됩니다.



청색 시대까지만 해도 피카소는 아직 무명이었고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청색시대 작품은 피카소의 그림 중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들에 속합니다. 이 시기 그림은 예쁘기도 하지만,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실제로 갖고 있는 색과는 관계없이 내 감정을 그림에 드러낸다는 것. 이때부터 피카소는 ‘잘 그리는 것’을 넘어 ‘자기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피카소는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가난한 예술가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운명의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름은 페르낭드 올리비에. 나이는 피카소와 동갑으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도망친 여성이었습니다. 페르낭드는 화가들의 모델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인기가 많았지만, 그녀는 피카소를 선택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회고했습니다. “첫눈에 반할 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고집스러운 표정, 눈의 광채는 저항할 수 없는 자석이었다.” 천재성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카리스마에 반한 겁니다.

페르낭드는 피카소가 제대로 사귄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를 만난 피카소의 그림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던 차가운 푸른색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나타난 건 정반대의 붉은색과 분홍색. 서커스 곡예사, 광대, 떠돌이 가족 등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까지 피카소의 작품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미술 역사를 바꿔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청색시대는 그리스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입니다. 장밋빛 시대는 당시 파리 미술계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초기의 피카소는 미술사에 여럿 있는 ‘훌륭한 화가’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곧 피카소는 입체주의라는 혁명을 통해 현대미술계의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500년의 전통을 부수다
페르낭드와의 연인 관계 덕분에 정신적으로 안정된 피카소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이전의 ‘잘 그린 그림들’을 걷어차고 누구도 가보지 않은 영역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시작하는 입체주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왜 대단하다는 걸까요.


1400년대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서양 미술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기본 규칙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건 크게, 먼 건 작게 그리는 ‘원근법’입니다. 한 시점에서 본 세상을 화면 위에 재현하는 것. 화풍은 조금씩 달랐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벨라스케스도, 렘브란트도 이 규칙 안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한쪽 눈으로 본 세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사진기가 등장했습니다. 사진기는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화가들에게는 존재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았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사진은 빛의 순간을 못 잡잖아”라며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이나 안개 낀 아침 풍경을 그렸습니다. 고흐나 고갱 같은 화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대상을 변형했습니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필터’를 씌운 겁니다. 세잔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하나의 화면에 여러 시점을 슬쩍 섞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피카소가 그 틀을 부쉈습니다. 입체주의 그림을 통해 정면과 측면, 뒤를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왜 한 방향에서만 봐야 해? 대상의 모든 면을 한 화면에 담으면 오히려 더 '진짜'에 가깝지 않나?” 그렇게 피카소는 정면을 보는 눈, 측면을 보는 눈, 옆에서 본 코, 날카로운 면으로 쪼갠 몸통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화를 냈습니다. 동료 화가들조차 “이런 게 그림이라고?”(마티스) “기름을 마시고 불을 뿜는 것 같은데?”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반드시 보이는 대로 그릴 필요는 없구나. 나도 세상을 보는 나만의 법칙을 만들고, 이걸 통해 나와 세상을 함께 표현할 수 있구나.’ 이후 현대미술의 거의 모든 흐름은 이 생각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미술사에 남을 혁명을 이룩한 피카소의 영향력은 점점 커집니다. 입체주의도 더 급진적으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연인인 페르낭드와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습니다. 페르낭드는 일기에 썼습니다. “그는 새로운 법칙을 만들겠다는 야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피카소의 괴팍한 성격, 연인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성격도 문제가 됐습니다.


그러던 중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친구(에바 구엘)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매몰차게 페르낭드를 버렸습니다.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과 뜨거운 사랑을 했습니다. 작품에 “나는 그녀를 사랑해(J'aime Eva)"라는 문구를 직접 써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몇 년 뒤 병에 걸려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동안, 피카소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느라 바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페르낭드는 어떻게 됐을까요. 페르낭드에게는 원래 작가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를 떠난 뒤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피카소가 준 그림 몇 점을 팔아 생활하고, 20년 뒤에는 피카소와의 생활을 담은 회고록을 출판하긴 했지만, 결국 그녀가 세상에 남긴 건 ‘피카소의 첫 번째 여인’이라는 이름뿐이었습니다. 피카소의 전기 작가 존 리처드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에게 차인 충격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수많은 연인 중에서도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여인은 일곱 명. 그 중 첫 번째 여인이 이렇게 퇴장했습니다. 앞으로도 여섯 명의 여인이 더 등장합니다. 연인이 바뀔 때마다 피카소의 그림은 변신했습니다. 발레리나와 결혼해 상류사회에 들어간 피카소는 갑자기 고전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28세 연하의 소녀를 만난 뒤 관능적인 곡선의 그림이 탄생했고, 카페에서 손에 칼을 꽂던 여자를 만나 역사적 걸작 ‘게르니카’를 그립니다. 다음 주 2편에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i>**이번 피카소 기사들은 A Life of Picasso (존 리처드슨 지음, 전 4권), Life with Picasso (프랑수아즈 질로, 칼턴 레이크 지음), Picasso: My Grandfather (마리나 피카소 지음), Loving Picasso: The Private Journal of Fernande Olivier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존 버거 지음), Picasso and His Friends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Portrait of Picasso as a Young Man (노먼 메일러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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