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 관람객이 8일 현재 1100만명을 넘어섰다. 한국 영화 천만 관객 달성은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이다. 200만~300만명 정도로 예상했던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 돌파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누구도 전망하지 못했다.
이건 몇 가지 측면에서 향후 매우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평단과 언론이 더 이상 대중의 취향과 감성, 욕망과 욕구를 간파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건 평단의 수준이 낮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의 수준이나 안목이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얘기 또한 아니다. 양쪽 모두 서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거나 듣고 있다는 것이다. 평단과 대중이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상업영화 관객들은 이제 더 이상 평론가나 언론의 영화 리뷰를 읽지 않는다. 그보다는 SNS 댓글 한 줄이 만들어 내는 입소문, 20자 평 등을 통해 영화를 선택한다.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입소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영화가 좋다 나쁘다였을까, 혹은 영화가 재미있다, 재미없다였을까.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 자체였다. ‘왕과 사는 남자’가 만들어 낸 천만 관객의 키워드는 바로 대중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도, 평단과 언론 내부의 평가까지 엇갈렸던 것도, 이 작품에 대한 시선이 평가에 몰려 있지 않고 궁금증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 영화에 관한 좋고 나쁨, 개인의 호불호 여부가 갈리자 그렇다면 스스로 영화를 보고 나서 판단하겠다는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방점은 ‘스스로 판단하겠다’에 찍혀 있다. 이 영화를 본 천만 가까운 관객들로부터 영화가 뛰어나다느니, 영화가 다소 허점이 많다느니 하는 식의, 한쪽에 치우친 ‘몰빵’ 평가가 비껴가는 모양새인 이유이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평론가, 리뷰어인 시대가 된 것이다.
또 다른 흥행 요소로 정치적 차이를 승화(昇華)시킨 측면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세조를 자기 조카를 죽인 악행의 군주로 보는 시각과 조선 초기의 왕권을 강화해 국가의 틀을 공고히 한 측면이 있다는 쪽 모두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기 위해 장항준 감독은 영리하게도, 영화에 세조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그가 강조한 캐릭터는 한명회(유지태)였다. 대중이 갖고 있던 한명회의 이미지는 키가 작고 왜소하며 음흉한 책략가였으나 장항준 감독은 강골 무인 기질을 지닌 세조의 이미지를 한명회에 덧입히는 쪽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이 같은 ‘환골탈태’ 캐릭터의 효과는 세조에 대한 긍·부정 평가를 넘어, 영화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영화적 효능감은 정치·사회적 이견을 지닌 양 진영 관객 모두가 자기식 해석으로 영화를 관람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잘못된 역사’가 무엇인지, ‘바로잡겠다’는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지 의도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정치관’으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포인트 중 가장 특이한 것이 바로 이 의도적인 정치적 모호성이다. 장항준 감독의 기막히게 영리한 상업적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영화계가 한숨 돌리는 모양새다. 그 누구도 천만을 예측하지 못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상반기 한국 영화계를 실로 놀라게 하고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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