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 인류의 현대사는 곧 반도체의 역사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없다. 인공지능(AI) 시대라는 변혁의 시점을 맞아 반도체는 미래에도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될 것이 확실하다. 반도체를 토대로 한 AI 기술은 인류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개척하고 있다. AI가 생활 편의성을 제고하고, 불치병·난치병을 정복해 인류 수명을 늘리고, 우주의 비밀까지 풀어내는 유토피아가 오랜 기간 산업 현장에서 살아온 나의 희망이자 기대다.‘새로운 길’을 여는 반도체의 특성은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를 보면 알 수 있다. 1996~1999년 당시 컴퓨터 게임용 3D 칩셋 시장에서 미국 기업 3dfx는 부두(Voodoo) 시리즈로 타사와 비교를 불허하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엔비디아는 처음에 중앙처리장치(CPU) 생산을 기획했지만, 이미 시장을 장악한 인텔 때문에 어렵다고 판단한 후 게임으로 수요가 증가한 그래픽 칩셋으로 눈을 돌렸다. 엔비디아는 1995년 최초의 그래픽 칩셋 NV1을 출시했지만 낮은 성능 때문에 부진을 면치 못했고, 이후 절치부심하여 1997년 저비용 고성능의 RIVA 칩셋을 내놓았지만 3dfx의 아성은 넘지 못했다. 1996~1999년 초반까지 용산전자상가의 그래픽 카드 진열대에는 엔비디아가 아닌 3dfx 제품이 그야말로 ‘전면 포진’하고 있었다.
엔비디아가 3dfx를 제친 계기는 1999년 3월 출시한 RIVA TNT2 시리즈다. 잘나가던 팹리스 기업인 3dfx가 자체 생산까지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고비용과 생산 기술력 하락을 맞은 반면, 엔비디아는 ‘선택과 집중’ 전략 아래 칩셋 연구개발을 지속한 결과다. 엔비디아는 이후 지포스(GeForce) 시리즈로 그래픽 칩셋 업계를 평정했고, 이는 고도화된 그래픽처리장치(GPU)가 AI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엔비디아의 사례는 반도체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여는 특수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가 2024년 6월 19일 역대 최초로 제출한 반도체특별법은 올해 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는 그간의 결과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글로벌 반도체 강국으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이정표가 마련된 것이다. 법안에는 반도체의 인·수·전, 즉 인력, 수력, 전력에 대한 다양한 의미 있는 규정들이 담겼지만, 결국 시장에서는 자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민간이 960조원을 투입한다. 반도체특별법에 따른 내년도 신규 반도체특별회계의 규모는 2조원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가려면 2조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반도체특별법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그 시작은 과감한 재정 지원이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반도체특별법을 통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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