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5,487.24
(96.01
1.72%)
코스닥
1,152.96
(4.56
0.40%)
버튼
가상화폐 시세 관련기사 보기
정보제공 : 빗썸 닫기

비극을 주체적 서사로…1000만 ‘왕과 사는 남자’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6-03-13 13:46   수정 2026-03-13 13:47




한국 극장가는 2025년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국내외 영화를 불문하고 한국 시장에서 1000만 영화는 탄생하지 않았다. 한국 영화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건 3위 ‘좀비딸’로 563만 명 관객을 기록했다. 1, 2위는 각각 ‘주토피아 2’(770만 명),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569만 명)으로 외국 애니메이션에 모두 자리를 내어줬다. 1000만 영화뿐만 아니라 상위권에서 한국 영화를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좀비딸’ 다음으로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야당’(8위)으로 337만 명에 그쳤다. 이제 한국 영화 시장에선 ‘1000만 영화’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고사하고 당장의 흥행 가뭄을 해소할 단비 같은 작품조차 나오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새해에 이 어두운 분위기를 깨고 1000만 영화가 탄생했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그 주역이다. 1000만 영화가 나온 건 2024년 영화 ‘파묘’와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영화다. 단종은 자주 사극에 나오긴 했지만 중심에 서진 못했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수양대군)을 중심으로 전개됐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종을 집중 조명하여 승리의 기록이 아닌 실패의 기록을 그린다. 그런데 오히려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침체된 영화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시각과 관계 설정으로 완성한 위로


현재의 어려운 시장 상황을 생각하면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매우 이례적이다. 국내에선 스타 중심의 캐스팅, 높은 제작비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발전으로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스타 중심의 대형 지식재산권(IP)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커졌고 한껏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참패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 시장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과거 관객 300만~500만 명을 동원해 온 중예산 영화도 흥행에 실패하긴 마찬가지였다. ‘왕과 사는 남자’도 규모로 따지면 중간급에 해당한다. 이 작품엔 제작비 105억원이 투입됐으며 손익분기점은 260만 명에 해당한다. 본래 중예산 영화들은 한국 영화 시장을 떠받치는 ‘허리’ 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엔 극장을 찾는 관객 자체가 줄어들며 중예산 영화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이 같은 제약을 모두 뛰어넘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 비결은 기존의 공식에서 탈피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관객들에게 이미 익숙한 인물인 단종을 다루면서도 새로운 시각과 관계 설정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적장손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할아버지인 세종을 비롯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정치적 비호 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소년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결국 그는 삼촌인 세조에 의해 밀려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단종은 작품 안에서 캐릭터 자체로 대중에게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었다. 세조와의 관계 속에서 나약하고 패배한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하지만 이 영화엔 세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되는 격정적인 과정도 아예 생략됐다. 기존 작품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캐릭터와 서사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대신 유배를 간 단종을 한명회가 계속 감시하고 대치하는 것으로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영화는 단종의 새로운 면을 부각한다. 이 작품에서 단종은 유약하고 수동적이며 어리기만 한 패배자가 아니다. 초반엔 슬픔과 고통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지만 그는 점차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호랑이를 쏘며 “네 상대는 나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작품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 관객 역시 이 장면을 통해 단종이란 인물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강인함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 더욱 부각된다. 영화는 사료에 단 두 줄로만 기록되어 있는 인물 엄흥도를 전면에 배치한다. 엄흥도는 마을의 부흥을 위해 단종의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이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명에도 끝까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영화에서 엄흥도는 단종의 다양한 면모와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는 단종의 곁을 지키며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우정을 나눈다. 단종이 백성들과 어울리도록 돕는 가교 역할도 자처한다. 단종이 마을 사람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관객들이 바라는 리더십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엄흥도는 “나리는 안 나약하고 안 어리석습니다”라며 단종의 곁에 그를 신뢰하는 친구이자 백성이 있음을 또렷이 각인시켜 준다.

단종의 죽음을 다룬 장면은 이 작품을 1000만 영화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종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기록 가운데 영화는 야사에 있는 단종의 죽음을 그린다.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해 단종이 가장 비참하고 외로웠을 그 순간을 엄흥도가 함께 하도록 한다. 의미 있는 역사적 상상력의 산물이자 단종을 향한 절절한 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단종의 죽음은 더욱 슬프고 묵직하게 느껴진다.

공유할 수 있는 감동과 가치


감독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기억의 밤’, ‘리바운드’ 등을 만든 장 감독은 그동안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발히 활동해 왔다. 특유의 입담과 솔직한 매력으로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쌓아왔다. 이번 영화는 무거운 역사적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장 감독만의 유쾌함이 녹아들어 차별화된 단종 서사가 완성됐다. 여기에 박지훈, 유해진, 유지태, 전미도 등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시너지가 났다.

신생 제작사 온다웍스 이야기도 화제가 되고 있다. 온다웍스는 이번 작품이 첫 영화에 해당한다. ‘범죄도시4’를 만든 비에이엔터테인먼트와 공동제작으로 흥행 성과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제작사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운 척박한 환경임에도 첫 작품부터 큰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OTT 시대에 관객은 왜 갑자기 극장으로 향했을까. 분명 이 영화는 완벽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호랑이 CG도 그렇고 다소 헐거운 부분들이 중간중간 눈에 띈다. 하지만 완벽한 작품은 이미 OTT에도 넘쳐난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작품, 스타가 출연해 눈을 뗄 수 없는 작품, 스릴과 반전이 넘치는 작품 등이 가득하다. 그런 시대에 오히려 이 영화가 흥행했다는 사실은 극장 개봉작이 이젠 완벽함이 아닌 다른 전략을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누군가와 같이 보면서 생각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작품, 작품 안에서 새로운 감동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한 편의 영화가 흥행했다고 한국 영화 시장 전체가 살아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계가 새로운 해법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이정표가 됐길 바란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