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회계사들은 자신을 ‘결산 노예’라고 소개한다. 12월 결산 법인이 사업보고서 제출을 준비하는 1~3월에 근무 강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단순 회계 업무는 인공지능(AI) 기술로 대체할 수 있지만, 전략 수립 등 판단이 필요한 업무는 여전히 사람 손을 거쳐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최근 8~10년 차 매니저급 회계사가 돌연사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혹사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빅4’ 회계법인 중 하나인 S사의 30대 회계사가 새벽까지 근무하고 귀가한 뒤 갑작스레 숨졌다. 이 회계사는 감사철을 맞아 실사와 서류 검토 등을 하기 위해 밤샘 근무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1월 같은 회계법인에서 비슷한 연차 회계사가 숨진 지 4개월 만에 또다시 발생한 사고다.
업계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과로사 배경으로 회계법인의 ‘저가 수주’ 경쟁이 거론된다. 저가 수임으로 발생한 손실을 실무자의 연장 근로로 메우는 구조가 회계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주장이다. 회계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며 고객사의 요청이 복잡해진 영향도 있다. 과거에 비해 회계사가 신경 써야 할 업무가 많아졌다는 얘기다.휴식권은 물론 업무량에 걸맞은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이후 회계업계에선 실무자가 실제 근무시간을 기록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이른바 ‘타임 치팅’ 또는 ‘유령 근무’ 관행이 일반화했다. 근무시간을 입력하면 개인과 소속 조직에 유무형의 불이익을 주겠다고 압박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단순 회계업무는 AI에 뺏기고 취업해도 덤핑수주에 시달려
11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2일 치러진 제61회 공인회계사 1차 시험 응시자는 1만2263명이다. 이 중 CPA 자격증을 손에 쥐는 것은 10분의 1인 1200명 안팎이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끝이 아니다. CPA 합격자가 정식 회계사로 활동하려면 2년간 실무 수습을 거쳐야 하는데, 이들을 받아주는 회계법인이 많지 않다. 지난해 4대 회계법인이 채용한 CPA 합격자는 700명 안팎이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인원이 정식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CPA 백수’로 전락했다.입사에 성공한 뒤에도 생존 경쟁이 녹록지 않다. 젊은 회계사가 담당하던 단순 회계 업무를 AI 플랫폼에 맡기는 곳이 늘면서 생존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고비는 고객사를 전담하는 매니저급이 되는 8~10년 차다. 과거 회계사는 ‘억대 연봉’의 상징이었지만 살인적인 업무 강도를 고려하면 옛말이라는 불만이 상당하다. 초과 근로를 비수기 휴가 및 수당 등으로 보상하는 유연근로제가 도입됐음에도 현장에선 ‘그림의 떡’이다. 낮은 보수로 일감을 따낸 상황에서 실제 근무 시간을 기록하면 해당 일감은 ‘적자 계약’으로 전락한다. 초과 근무 기록을 인위적으로 누락하면 비용이 줄어들어 회사의 장부상 이익을 맞출 수 있다.
전문가들은 매년 특정 시즌마다 회계사를 물리적·정신적 한계로 내모는 구조는 감사 품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황병찬 청년회계사회 회장은 “실제 근무 시간을 투명하게 기록하지 못하게 막는 관행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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