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12년 만에 채권시장 ‘큰손’으로 돌아온다. 달러를 국내로 들여와 달라는 정부 요청에 따라 불어난 원화 자산을 굴려야 해서다. 대출 규제 영향으로 은행들은 대규모 자금 유입에 난색을 보이는 만큼 자금 운용 방식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소 2조원 규모 회사채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복수의 대형 자산운용사에 채권 투자 관련 제안서를 내라고 주문했다. 현재 운용사 선정을 위한 검토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한 운용사는 삼성전자에 만기 3개월 이내 AAA등급 특수은행채와 시중은행채에 절반씩 투자할 것을 제안했다. 예상 수익률은 연 2.7%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자산운용사를 거치는 간접 투자 방식을 택한 것은 금리 변동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시중은행 예금(연 2%대)보다 높은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가 채권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보유 현금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125조8471억원에 달한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안정성을 우선해 시중은행 예금을 이용했다. 그러나 최근 부동산 대출 규제 등으로 마땅한 대출처를 찾지 못한 은행들이 대규모 예금 유치에 난색을 보이자 채권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삼성전자는 현금 보유액이 60조원을 넘긴 2014년에도 국고채 3000억원어치를 매입해 운용했다.업계에선 채권시장으로 흘러드는 ‘반도체 머니’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반도체기업이 깜짝 실적을 이어가서다. 증권가는 올해 삼성전자가 작년 대비 네 배 이상 증가한 200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전년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난 160조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보유 현금만 해도 웬만한 중대형 금융회사 운용 자산과 맞먹는 만큼 채권시장 전반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운용 부담에 '난색'
국내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호황으로 쌓아둔 현금이 160조원을 돌파하면서 이 자금의 행방에 이목이 쏠린다. 전통적 곳간인 은행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 규제 등으로 대출 영업이 힘들어진 은행들이 예금 유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장에서는 수조원대 ‘반도체 머니’가 채권시장을 비롯한 자본시장으로 유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주요 시중은행을 상대로 원화와 달러 자금을 가리지 않고 만기 2개월 이내의 단기 예금 상품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금리부 수시입출식 예금(MMDA), 단기 정기예금 등이 주요 대상이다. 현금을 오래 묶어두기보다 비교적 안전하게 굴리면서도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확정금리형 상품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은행들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운용 부담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맡기려는 자금은 규모가 크고 만기가 짧아 사실상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단기성 자금에 가깝다. 은행으로선 안정적으로 굴릴 투자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수익을 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주요 은행은 삼성전자 자금을 적극적으로 받기보다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일부 수용하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가계대출이 각종 규제로 사실상 막혀 있어 예금을 받아도 이를 대출로 연결하기 어려워 자금 운용이 제한적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대형 우량 고객의 자금이란 점에서 반갑긴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마땅한 운용처를 찾기 쉽지 않다”며 “무작정 많이 받을수록 은행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기업들의 자금이 채권시장으로 본격 유입될 경우 시장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채권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들은 향후 AI 인프라 투자를 위해 현금을 쥐고 있어야 하는 ‘대기 자금’ 성격이 강하다”며 “안전 자산인 국공채나 우량 금융채 위주로 자금이 투자되면 단기 금리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철/최석철/김진성/김채연 기자 bjc@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