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업체 클라크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6일 기준 30만t급 5년 차 중고 VLCC 가격은 1억4000만달러(약 2000억원)로 집계됐다. 같은 날 동일 규모 신조 VLCC 계약 가격은 1억2850만달러였다. 중고선이 신조선보다 8.9%, 금액으로는 1150만달러 비싼 셈이다. 중고 VLCC 가격은 지난해 2월 1억1200만달러에서 1년 만에 25.0% 올랐다. 업계에선 “새 배를 주문해도 인도까지 3년 이상 걸리다 보니, 당장 투입 가능한 배에 웃돈이 붙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고선 가격 급등의 직접적 배경은 운임 폭등이다. 이달 둘째 주 30만DWT(재화중량톤수)급 VLCC의 하루 평균 운임은 42만3736달러로 전주보다 102.2% 올랐다. 지난해 10월 둘째 주 하루 6만8146달러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5개월 만에 여섯 배 넘게 뛴 것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글로벌 VLCC 60여 척의 발이 묶이면서 시장에 풀린 선복 자체가 급감한 데다, 정유사와 원유 트레이더들이 중동 외 지역으로 조달선을 넓히면서 장거리 운송 수요까지 늘어난 영향이다. 업계에선 “같은 물량을 옮기더라도 항로가 길어지면 필요한 선박 수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며 “선복 부족이 운임 급등으로 직결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선 이번 급등이 단순한 전쟁 프리미엄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몇 년간 선사들은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규제 강화와 장기적인 석유 수요 둔화를 예상해 유조선 발주를 줄여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 석유 소비가 꾸준히 늘고 있고, 러시아·중동·미국을 잇는 원유 교역 흐름도 더 복잡해지면서 유조선의 실질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 여기에 20년 이상 된 노후 유조선 교체 수요까지 겹치면서 선박 수급은 더 빠듯해지고 있다.
특히 VLCC는 공급 확대가 쉽지 않은 선종이다. 길이 300m, 폭 50m 안팎의 초대형 선박인 만큼 대형 독(dock)과 깊은 수심, 골리앗 크레인을 갖춘 일부 조선소만 건조할 수 있다. 한국 조선 3사인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은 이미 액화천연가스(LNG)선과 컨테이너선, 고부가가치 친환경 선박 수주로 독이 가득 찬 상태다. 중국 조선사들이 VLCC 수주를 늘리고 있지만, 선주들 사이에선 납기와 품질, 지정학 리스크 등을 감안하면 한국 조선소를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가 필요하다고 해서 당장 만들어낼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며 “지금은 새 배보다 당장 투입 가능한 중고선 가치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라고 말했다.
중고 VLCC 가격 강세는 선령이 낮은 선박일수록 더 두드러진다. 연료 효율이 좋고 환경 규제 대응이 상대적으로 쉬운 5년 안팎 선박에 수요가 집중되면서, 시장에서는 사실상 ‘즉시 투입 가능한 준신조선’으로 취급받고 있다. 반면 15년 이상 고령 선박은 운항 가능 기간과 유지비, 환경 규제 부담 등을 고려해야 해 같은 VLCC라도 가격 차이가 더 벌어지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예전엔 중고선 시장이 단순히 가격이 싼 배를 찾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시간 가치를 사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장금상선의 시장 지배력은 운임 협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이 회사는 최근 글로벌 정유사들에 중동 노선 VLCC 용선료로 하루 80만달러 수준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시장 평균 운임보다 훨씬 높은 특수 호가다. VLCC 대표 노선인 사우디아라비아~중국 상하이 항로를 기준으로 하면 편도 운항 수익이 300억원을 웃도는 수준이다. 노르웨이 선박 중개회사 펀리스는 장금상선이 지난달 VLCC 단기 운송 계약 시장의 37%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했다.
장금상선의 공격적인 선대 확장도 중고선 가격 상승세를 부추긴 요인으로 꼽힌다. 이 회사는 지난해 12월 중고 VLCC 15척을 한꺼번에 사들인 데 이어, 미국·이란 전쟁 직전인 지난달 20일에도 싱가포르 해운사 AET로부터 VLCC 한 척을 추가 매입했다. 업계에선 장금상선이 운임 상승기에 현금 창출력을 바탕으로 다시 선박을 확보하고, 이 선박이 다시 시장 지배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본다. 단순히 전쟁 수혜를 보는 차원을 넘어, 유조선 시장 재편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운임 상승 국면에서 선대를 미리 확보한 선사와 그렇지 못한 선사의 격차도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선복을 충분히 가진 선사는 단기 시장에서 운임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선박을 확보하지 못한 곳은 높은 용선료를 감수하고 배를 빌리거나 아예 계약을 포기해야 한다. 업계에선 올해 VLCC 시장이 단순한 운임 상승장이 아니라, 선복을 보유한 상위 사업자에게 시장 지배력이 집중되는 국면으로 보고 있다. 최광식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장금상선은 글로벌 VLCC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라며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 올해 조 단위 영업이익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심 얕은 멕시코만 항구 접근 가능…미국산 석유 수요 맞물려 몸값 높아져

유조선 품귀 현상은 VLCC를 넘어 다른 선종으로도 번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이다. 수에즈막스는 12만~16만DWT 규모로 VLCC보다 적재량은 적지만, 몸집이 가벼워 수심이 얕은 항만에도 접안할 수 있다. 평균 수심이 20m대인 멕시코만 연안 미국 항구에 접근할 수 있어, 중동 대신 미국산 원유를 들여오려는 수요와 맞물려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중동산 원유 조달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미국산 원유를 멕시코만에서 선적해 아시아로 보내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는데, 이때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형이라는 점이 수에즈막스의 강점으로 꼽힌다. VLCC는 흘수와 선형 제약이 커 항로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지만, 수에즈막스는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데 유리해 아시아행 장거리 수송에서 더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VLCC가 한 번에 대량 수송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수에즈막스는 항만 제약이 있는 지역과 장거리 우회 항로에서 기동성 있는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수에즈막스급 발주는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 해운시장 분석회사 베슨노티컬에 따르면 지난해 수에즈막스급 신규 발주량은 74척으로 전년보다 48% 증가했다. 같은 기간 VLCC 신규 발주량은 소폭 감소했다.
VLCC를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조선소 독이 이미 3~4년치 일감으로 차 있는 상황에서, 당장 배가 필요한 선주들이 중형 조선소에서도 건조할 수 있는 수에즈막스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산 원유 물동량 증가와 항로 다변화 흐름도 수에즈막스 수요를 떠받치고 있다. 대한조선 등 중형 조선소들은 지금 주문을 받아도 2029년에야 인도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선 VLCC 대체 수요와 노후 선대 교체 수요가 동시에 유입되면서 수에즈막스 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중고선 가격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5년 차 중고 수에즈막스 가격은 지난 6일 기준 8800만달러로, 같은 날 신조선가 8750만달러를 웃돌았다. VLCC에 이어 수에즈막스까지 중고선이 신조선보다 비싸진 것이다. 이는 단순한 풍선효과를 넘어 유조선 시장 전반에서 ‘즉시 운항 가능한 선박’의 희소가치가 높아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선주 입장에선 새 배를 발주해 수년을 기다리기보다, 당장 투입 가능한 중고선을 확보해 운임 급등 국면에 대응하는 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에즈막스는 노후 선대 비중이 높아 교체 수요가 구조적으로 크다”며 “VLCC 공급 부족이 이어지는 한 대체 선종으로서 인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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