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석유기업과 공화당 사이의 관계는 혈맹이라고 부를 만하다. 주요 선거 때마다 석유업계는 정치 기부금의 압도적인 비중을 공화당에 쏟아 넣는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공화당은 에너지 독립과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석유 시추 허가 확대, 환경 규제 철폐 등을 추진해 왔다.하지만 최근 석유기업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사이에 균열이 감지된다. 백악관에서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 더그 버검 내무부 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 각료와 엑슨모빌, 셰브런, 코노코필립스 등 석유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만난 자리에서다. 여기에서 라이트 장관 등은 유가 안정을 위해 미국 내 석유 생산량을 최대한 끌어올려달라고 요청했다.
대런 우즈 엑슨모빌 CEO는 “투기적 수요가 예상보다 크게 유입될 경우 유가는 현재 수준을 넘어 더 상승할 수 있으며, 정제 제품 공급 부족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 워스 셰브런 CEO와 라이언 랜스 코노코필립스 CEO 역시 공급 차질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화당과의 ‘특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석유기업들이 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집권 기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방식으로 민간 기업을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해외에 공장이 있는 기업들에 미국으로 리쇼어링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관세 부담을 판매가에 반영하려는 기업에는 경고를 보냈다. 그런 저돌적인 요구에 대부분 기업은 순응했다.
백악관 만남에서 나온 석유기업 CEO들의 쓴소리는 미국식 자유주의 시스템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주주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주주에 대한 신의성실 의무를 우선시하는 시장 자유주의적 가치가 트럼프 행정부에 일정 부분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서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므로 유가가 오르면 우리는 많은 돈을 번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 석유기업에 먹히지 않는 이유다. 석유기업들은 유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비자가 지갑을 닫고 에너지 소비를 영구적으로 줄이는 ‘수요 파괴’ 현상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다.
석유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애국심 호소보다 기업의 수익성과 주주 가치를 우선하는 월가의 자본 규율을 더 무겁게 여긴다. 정치 권력에 기대는 것보다 시장에 주는 신뢰가 비즈니스의 본질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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