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의 전설, 다시 무대에 서다…김지영이 김지영을 연기할 때

입력 2026-03-26 15:19   수정 2026-03-26 15:20

"근데 슬펐을 때는 그 공연이 끝나고, 그 공연을 더 이상 못 한다는 게 내가 되게 슬펐던 거 같아. 그래서 꿈에도 나오고 그랬어요. 그 첫사랑 같은 공연이 끝나니까, 내 첫사랑이 끝났잖아. 그 첫사랑이 끝난 것에 대한 슬픔이 너무 컸어요."
- 김지영, 발레공연 <김지영의 ONE DAY 2>, 2026 中에서



발레예술가 김지영에게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언젠가는 무대에서 프로 무용수로 발레공연을 못 하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 국립발레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행한 수많은 인터뷰 역시 언제나 이 주제로 귀결됐다.

종국에는 당연히 맞닥뜨리게 될, 너무도 명백한 현실임에도 그녀는 도무지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결국 그녀가 그 절체절명의 공포와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새로운 공연에 계속 도전하는 것뿐.

내년이면 발레 입문 40년을 맞는 김지영은 2026년 3월 18일 봄을 맞는 길목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기념비적인 공연(발레공연 <김지영의 ONE DAY 2>, 총연출 유회웅, 마포아트센터)에 올랐다.

당대 최고의 발레예술가를 논할 때 첫손에 꼽히는 김지영. ‘한국 발레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구태의연한 레토릭을 쓸 수밖에 없는 인물. 국립발레단 최장수 수석무용수 자리를 스스로 2019년 내려올 때, 그 이후 7년이 넘도록 그녀가 이토록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며 현역으로 활동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가장 그랬다. 본인이 생각해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한 시점에서의 은퇴였고, 경희대학교 예술대학 무용과 발레 전공 교수라는 새로운 타이틀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자리로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춤을 멈출 수 없었다. 정말이지 하기 싫지만, 매일매일 엄청난 근력 및 유산소 운동, 그리고 발레 연습을 하며 20대 시절의 몸을 유지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본업에 물론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은 춤을 추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10대 시절 러시아 최고 발레 명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Vaganova Ballet Academy) 졸업 공연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끔찍이 아끼는 막내딸이 세계 일류 발레 스쿨에서 학업을 마무리하는 기쁜 날, 딸의 춤을 보며 갑자기 숨을 거둔 어머니. 김지영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마주한 극한의 상실. 마치 비극 발레의 한장면 같은 죽음.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의 슬픔에서 김지영을 꺼내준 것도 발레였다.

"발레 없었으면 나는 못 살아남았을 거야. 되게 외로운 아이였거든요. 평범하게 못 살았을 거 같아. 발레가 나에게는 치료제 같은 거예요. 근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은 발레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잘살 수 있었던 거 같아. '안 그랬으면 되게 힘든 삶을 살았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 김지영, 발레공연 <김지영의 ONE DAY 2>, 2026 中에서



김지영의 감성은 장조(長調)가 아닌 단조(短調)다. 세상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일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예술은 뼈를 깎는 부단한 자기 수련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녀에게 발레라는 예술은 ‘영원히 자신에게 온 마음을 다 주지는 않는 첫사랑’이며, ‘결국은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유토피아’다.

"(저도) 힘들 때가 있죠. 당연히 열심히 안 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좀 진정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열심히 안 했다?' 그렇다면 결과를 받아들여야죠. 욕심만 많지 말고. 내 생각에는 (다들) 너무 빠른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무용은 긴 마라톤이잖아. 그리고 무용은 거짓말을 안 해. 무용이 거짓말을 안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안 했으면 좋겠어."
- 김지영, 발레공연 <김지영의 ONE DAY 2>, 2026 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명작에서 여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녀지만, 이번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난생처음 맡는 배역이다. 공연 캐릭터가 바로 발레예술가 ‘김지영’. 그녀 자신을 연기하는 최초의 무대다.

김지영으로 분한 어린 소녀의 앙증맞은 춤으로 시작한 무대는 그녀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이어진다. 작품에 따라 오열했다가, 폭소를 터뜨렸다가, 그야말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김지영이 김지영을 연기하며 배역과 자신이 물아일체(物我一體)된 모습은 지극히 아름다웠지만 참으로 슬펐다. 그러한 춤을 추는 자체가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연기하는 것이니까.



공연의 후반부는 창작발레 ‘화이트 드레스’로 이어진다. 이 작품 역시 김지영이 주인공. 순백의 화이트 드레스는 김지영 자신이기도 하며, 발레 그 자체를 상징한다. 압권은 암전된 무대에 실루엣만 보이는 가운데 추는 독무. 완벽한 피지컬의 김지영이 추는 춤은 ‘예술은 절대 고독을 이겨낸 자기 극복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0대 시절에 필적하는 몸에 그때와는 비교 불가하게 완성도 높은 춤은, 발레라는 장르가 실은 ‘나이 듦의 미학’이 필요한 예술임을 일깨운다.

이번 공연은 그녀 예술 인생의 가장 중요한 2개의 축(국립발레단, 경희대 무용과)이 함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공연 총연출은 국립발레단 후배이자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고 있는 발레안무가 유회웅, 공연 중간에 상영된 다큐멘터리와 사진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으로 실력파 사진작가 김윤식이 맡았다.



누구보다 김지영의 예술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이들이 만든 무대였기에 그 어떤 무대보다 발레예술가 김지영의 입체적 면모가 돋보였다. K-발레 자체의 역량이 놀라울 만큼 비약했기에 가능한 무대. 특히 연출과 영상을 모두 실제 정상급 발레리노 출신들이 담당해 발레와 영상이 어우러진 융복합예술을 선보였다는 점이 신선했다.

직접 김지영의 지도를 받고있는 경희대 무용과 발레 전공 제자들의 춤도 뭉클한 지점. 한국 발레계 레전드와 한 작품에 선다는 자긍심과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대는 발레 문외한이라도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녀도 우리도, 김지영이라는 발레예술가가 언제까지 무대에 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안다. 무대에 서는 한 김지영은 최고의 무대를 선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무대에 서는 한 김지영은 행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한때는 내가 '발레는 나에게 축복이자 저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발레는 나에게 축복인 것 같아."
- 김지영, 발레공연 <김지영의 ONE DAY 2>, 2026 中에서

그러니 이번 공연의 제목처럼 언젠가(One Day), 그녀가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해도 어쩌랴. 그것이 인생인 것을. 결국 그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그녀가 아직 무대 위에 있는 동안, 그녀의 춤을 마음껏 누리는 것뿐.

[발레리나 김지영의 'ONE DAY 2' 영상작업]

최효안 예술 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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