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건 자신이 몸담았던 유일한 세계를 파괴하고 마주하는 첫 번째 비명일 수 있다. 좁고 어두운 병 속에서 엄청난 압력을 견디며 숙성한 와인이 드디어 새로운 세계로 탈출함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이랄까. 고통스런 투쟁 끝에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그런 의미에서 샴페인과 어울린다.

안락한 세계를 깨뜨리고 나오는 고통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한 젊음이 안락한 유년의 껍질을 깨고 자기 자신이라는 신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치열한 성장기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를 둘러싼 세계는 따뜻하고 안전했다. 부유한 부모님의 보호,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들,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밝은 세계가 그의 전부였다.
그러나 싱클레어에게 그 세계는 스스로를 가두는 가장 견고한 감옥이기도 했다. 깨지지 않은 알 속의 생명이 결국 부패하듯, 변화를 거부한 영혼은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말라가기 마련이다. 알을 깨지 못한 새는 결코 신에게 날아갈 수 없다.
성장을 멈춘 채 안정을 만끽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란 기묘한 친구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맞닥뜨린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의 다른 면을 목격한 소년은 비로소 투쟁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 <데미안> (민음사, 122쪽)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란 균열을 만나 껍질을 깨뜨렸을 때 마주한 건 시린 공기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성장은 이토록 거대한 압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을 정제해가는 인고의 과정이다. 내가 믿어왔던 안락한 질서를 스스로 부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파괴적 행위다.

샴페인 병 속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성장
샴페인의 탄산이 병 안에서 차오르는 과정은 성숙의 임계점에 도달하는 자아의 팽창과 닮았다. 샴페인은 좁은 유리병 안에서 탄생한다. 투명하고 평범한 베이스 와인은 병 속에 갇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당분과 효모의 2차 발효 과정을 견딘다. 발효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는 밖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다시 와인 속으로 제 몸을 짓눌러 녹여낸다.
이때 발효를 마친 효모는 병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며 자가분해를 통해 샴페인에 갓 구운 브리오슈의 고소함과 구운 견과류의 풍미를 부여한다. 싱클레어가 유년의 순수했던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안락한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단단한 개인으로 태어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의 내가 죽어 밑거름이 되어야만 더 깊은 영혼의 향기가 피어오른다는 성장의 '잔인한 진리'가 샴페인 병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흔히들 샴페인에서 잔 위로 솟구치는 기포의 화려함만 보지만, 사실 그 본질은 '해방되지 못한 자의 투쟁'이다. 아직 알을 깨지 못한 새가 껍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근육을 키우듯, 샴페인 역시 약 6기압에 달하는 압력을 견뎌내며 밀도를 높인다. 마침내 코르크를 밀어내고 터져 나오는 짧은 신음은, 수년간 자신을 가둬 온 병 밖으로 나와 마침내 드넓은 세상으로 비상하는 소년의 첫 번째 숨결이다.
코끝을 스치는 성숙한 자아의 향기
소설을 읽을 때 잔을 채우면 좋을 만한 샴페인으로 '찰스 하이직 브뤼 리저브'를 추천한다. 이 샴페인은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든 햇와인에, 평균 10년 이상 세월의 켜를 쌓아온 오래된 리저브 와인을 무려 50%나 섞는다. 통상의 샴페인 하우스가 10~20% 내외의 리저브 와인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두드러지게 높은 비중이다.
리저브 와인은 소설 속 데미안 그 자체다. 유약하고 미숙한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나직이 울리는, 수만 년의 지혜를 간직한 오래된 영혼의 목소리라서다. 햇와인이 지닌 풋풋한 산미가 자칫 가벼운 일탈로 끝날 수 있을 때, 10년 이상의 풍파를 견뎌낸 리저브 와인의 묵직한 깊이가 그를 다독이며 인생의 바디감을 부여한다. 서로 다른 시간이 병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완벽한 우주를 이루는 이 블렌딩은 선과 악,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통합된 신 '아브락사스'를 향해 나아간 싱클레어의 여정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다.
찰스 하이직의 기포는 거칠지 않다. 마치 오랜 방황 끝에 평온을 찾은 싱클레어의 미소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게 혀를 감싼다. 코끝을 스치는 농익은 과실과 아몬드 풍미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자만이 풍길 수 있는 성숙의 향취다.

새롭게 도전하는 이들을 위한 신호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모든 이에겐 샴페인을 딸 자격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압력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건 오랫동안 몸담은 조직을 떠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두려움일 수도, 가슴 속 깊이 묻어둔 꿈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불안감일 수도 있다.
샴페인 코르크를 누르는 철사망을 풀어내며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반동을 느껴보라. 이는 해방을 갈망하는 영혼의 절박한 몸짓이다. '펑' 하고 터지는 굉음은 자신의 유일한 세계를 파괴하고 마주한 첫 번째 비명이며, 이윽고 잔 위로 솟구치는 미세한 기포는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한 흔적이다.
그러니 너무 이른 축배라고 주저할 필요는 없다. 껍질을 부수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펼친 당신은 충분히 기념받아 마땅하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마침내 자기라는 신을 향해 날아가듯, 무거운 어둠을 뚫고 나온 당신의 영혼은 이제 막 잔 위에서 부서지는 황금빛 거품처럼 눈부시게 아름답다.

신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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