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에 있는 요리교실 스튜디오에는 식기와 조리도구, 각종 도구를 보관해 두는 팬트리 같은 공간이 있다. 그 한쪽 구석에는 A4 용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가끔 “선생님, 지난달에 두고 간 레시피 아직 보관해 주고 계세요?”라고 묻는 수강생들을 위해 따로 모아둔 레시피 묶음이다. 작년부터 다시 쌓이기 시작한 그 높이는 지금 약 8cm. 재작년의 12cm에 비하면 꽤 줄어든 셈이다.언제부터인가 스튜디오 한켠에 레시피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신기한 점은 그 레시피를 두고 간 주인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겨진 레시피 더미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이 괜히 가라앉곤 했다. 내 한국어 표현이 완벽하진 않더라도, 수강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써 써 내려간 레시피인데. 혹시 우리가 함께 만든 요리가 맛이 없었던 걸까, 수업이 즐겁지 않았던 걸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여전히 쌓여가는 레시피를 보아도 더 이상 마음이 내려앉지 않는다. 요리교실에 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레시피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채소를 씻고 한 접시씩 요리를 완성해 나가며 같은 식탁을 나누는 시간과 기억이라는 것을, 이제야 깊이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뒤 시작한 요리교실은 올해로 18년째를 맞았다. 애초에 요리교실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단독주택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은 연희동 같은 서울의 한적한 동네에서 단독주택에 산다는 건 한국의 부동산 흐름에 맞지 않는다며 만류했지만, 이 집에서 살았기에 18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요리교실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셰프였던 아버지 곁에서 ‘맛있는 것을 만드는 일’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래서 유학을 하면서도,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품고 살아왔다. 요리교실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국 요리와 베트남 요리 수업을 다니며 나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언젠가는 나도 요리교실을 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을 그려왔다.

기다림이 무르익는 순간이 있다. 인생에는 그런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온다.
“히데코 씨, 다음엔 파에야 좀 가르쳐 주세요.” 베트남 요리 수업에서 함께 배우던 일본인, 한국인 친구들의 제안으로 예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배운 파에야를 연희동 집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첫 요리 교실이었다. 당시에는 집에서 쓰던 식기와 커트러리 밖에 없었고, 누군가에게 요리를 가르친 경험도 없었기에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파에야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괜찮아. 포크 없어도 돼. 나 젓가락으로 먹을게. 하나씩 맞춰가면 되잖아.” 친구들이었지만 모두 나보다 선배 언니들. 재료비 명목이라도 수강료를 받는 이상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 한마디에 어깨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이후에도 언니들은 매달 한 번씩 연희동을 찾아와 언니답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조금씩 퍼져나간 요리교실은 지금까지 18년 동안 한 걸음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18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여자는 마흔부터 어른으로 인정받는 거야’라고 생각하던 내가, 마흔이 되던 해에 시작한 요리교실.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수많은 직업 중에서 이 일이 과연 꼭 필요한 일일까,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일일까 생각하다 보면 괜히 마음이 약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은 수강생들의 말이었다.
“선생님, 다음 달에 처음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집에 모실 건데 메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결혼식 이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지혜 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운 요리보다, 지혜 씨가 잘하는 걸로 하는 게 실패하지 않아서 좋지 않을까요?”, “근데 시어머니는 담백한 걸 좋아하시고 시아버지는 일본 요리를 좋아하신대요”, “그럼 일본 요리로 하죠. 지난번에 배운 치라시스시랑 차완무시 어때요?”, “좋긴 한데…차완무시 잘 될지 걱정이에요.”
결국 지혜 씨가 고른 메뉴는 일본요리의 돼지고기 삼겹살 간장조림, 백합 맑은국, 차완무시였다. 레시피 파일을 여러 번 넘기며 고민해 정한, 첫 손님을 위한 메뉴였다.
며칠 뒤 지혜 씨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시부모님이 정말 맛있다고 하셨어요. 너무 긴장해서 국을 넘치게 해버렸지만요. 그래도 책 레시피대로 했더니 대성공이었어요.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집에 오셔서 와인 한잔 하세요!”

아, 다행이다. 나에게 딸이 있었다면, 시집간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느낌일까 싶다. 그 주말 그녀가 준비해 준 음식은 ‘지중해 요리’ 책에 실린 프로방스식 닭고기 레몬 요리였다. 수업에서 배운 덕분인지, 그 맛은 내가 만드는 것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지혜 씨는 이제 곧 마흔. 맞벌이를 하며 세 살이 된 딸을 키우고 있는 그녀는, 연희동까지 오갈 시간이 없어 요즘은 1년에 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한다. 요즘 그녀는 가족을 위해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요리교실에 다니며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제자들도 많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수업이지만, ‘요리’라는 소통의 방식을 통해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일과 가정의 균형, 가족 간의 고민 등 인생의 변화와 순간들을 함께 나누어 왔다. 레시피보다도 수업에서의 시간, 맛, 공기, 대화의 흐름까지 포함된 기억이 우리를 이어준다.
요리를 좋아해 새로운 요리를 배우기 위해 여러 요리교실을 찾아다니는 예원 씨. 동탄에서 사는 사는데 신촌의 직장까지 평일에는 버스를 갈아타며 출퇴근하고, 퇴근 후에는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 저녁을 준비한다. 주말에는 또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나오는 것이 나였다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연희동의 구르메레브쿠헨까지 찾아온다. 평소에는 말이 적지만, 와인을 마시면 조금씩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요리교실 레시피는 뭐예요?”, “처음 등록했던 지중해 요리 수업에서 배운 스페인 요리, 파에야예요” 실제로 나의 시그니처 레시피라고 할 수 있는 파에야는, 많은 사람들이 ‘수업에서 먹는 음식’, ‘선생님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원 씨는 그 파에야를 집에서 다시 만들어 봤다고 했다.
“잘 될까 정말 긴장했어요. 레시피 메모를 보면서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어느 순간 선생님 스튜디오에 가득했던 그 고소한 파에야 향이 집 안에 퍼지는 거예요. 그때의 안도감과 기쁨은 잊을 수 없어요. 선생님, 요리는 감각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몸을 움직여 근육을 단련하듯, 요리를 통해 오감을 기르는 훈련이 되는 거라고 느꼈어요. 그게 일상 속 작은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고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예원 씨가 만든 파에야를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요리교실에서 함께 만들고 맛본 경험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다시 그 레시피로 요리를 해 보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이 희미하지만 따뜻하게 마음과 혀에 남는 것. 그들이 그 기억을 말로 전해 줄 때, 나는 행복하다.
오랜 시간 요리교실을 운영하다 보면 “제자를 따로 키우지 않으세요?”, “준비나 설거지는 사람을 쓰고, 수업은 요리만 가르치면 더 수월하지 않으세요?”와 같은 조언인지 간섭인지 모를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요리를 가르쳐 왔다기보다, 요리를 통해 사람들에게서 배워온 18년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이든, 10년이든 이곳에서 함께 요리를 만들고 시간을 나누었다면 모두가 나의 제자다. 나를 키워 준 이 시간과 인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맛의 기억. 지혜 씨가 만들어 주었던 프로방스식 레몬 닭고기 팬구이는 지금도 내 마음과 혀에 남아 있다. 부디 한 번 만들어 보시길 바란다. 그 맛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기를.

닭다리살 500g소금 1작은술
닭고기 재우는 양념잘게 다진 양파 1큰술디종 머스터드 50ml올리브오일 2큰술 꿀 2큰술 레몬즙 1개분
레몬 슬라이스 1/2개타임 4줄기
올리브오일 2큰술
1. 닭고기는 지방과 핏덩이를 가위 등으로 제거한 뒤, 흐르는 물에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소금을 뿌려 밑간해 둔다.
2. 볼에 닭고기 양념 재료를 넣고 잘 섞는다.
3. ②에 닭고기를 넣고 레몬 슬라이스와 타임을 올려 30분 정도 재운다.
4. 팬을 달군 뒤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닭고기를 껍질 쪽이 아래로 가도록 올려 중불에서 노릇하게 굽는다. 뒤집어 반대쪽도 굽다가 뚜껑을 덮고 약불에서 5분 정도 더 익힌다. 이때 재울 때 사용한 레몬 슬라이스도 함께 굽는다.(오븐을 사용할 경우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약 30분간 굽는다)
5. 접시에 담고, 넓은 파스타면을 삶아 곁들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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