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셰프'가 차리는 파인다이닝… '기가스' 셰프 정하완

입력 2026-03-27 14:50   수정 2026-03-27 14:51



레스토랑 기가스의 모든 디쉬는 밭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테이블 위에 오르는 구황작물과 허브와 꽃은 정하완 셰프가 경기도 군포의 종택(宗宅) ‘와니농장’ 에서 직접 심고 가꾸고 캐낸 것들이다. 이를 위해 정 셰프는 일주일에 이틀은 꼬박 밭에서 시간을 보낸다. 덕분에 손님들은 옥잠화, 투탕카멘 콩, 연꽃 열매, 눈물콩처럼 1년에 겨우 몇주일만 나는 귀한 재료를 맛볼 기회를 얻는다. 아직 추위가 남아있던 늦겨울, 어김없이 밭을 들여다보고 온 정하완 셰프를 만났다.

겨울은 농사가 쉬어가는 기간 아닌가.
겨울이라고 땅이 쉬는 것이 아니다. 땅을 부직포로 덮어놓으면 시금치나 무 같은 채소들은 그 안에서 자란다. 타임처럼 땅에 바짝 붙어서 자라는 몇 가지 허브들은 영하 10도 버텨낸다. 이번 겨울에는 새로운 농사법을 도입해서 시도하고 있다. 치즈 아티장(장인) 김소영 씨에게 배운 것으로, 뉴욕의 겨울 농사법이다.

기가스의 겨울 테이블은 어떻게 다른가.
무과의 채소가 많이 오른다. 또, 가을에 캐서 보관하고 있는 작물이 식탁에 함께 오른다. 제철 작물이라는 것이 꼭 지금 수확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채소들은 수확을 하고 나서도 맛이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감자, 호박처럼 전분이 많은 구황작물은 숙성이 필수다. 맛에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는 사람 보다 시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요리 연구보다 농사 연구에 시간이 더 들이는 것 같다.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려면 그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손님 한명 한명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돈이 쫓는다고 쫓아지나. 농사법을 연구하는 것도 이렇게 해야 맛이 올라가고, 손님들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생산자를 찾는 방법도 있을 텐데, 직접 농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사실 생산자를 찾고 협약을 맺어서 제품을 받으면 수월하다. 그러나 컨트롤이 어렵다. 우리는 매주 농장에 가서 땅의 상태를 보기 때문에, 작물의 상태가 좋지 않아도 메뉴를 바꾸는 식으로 바로바로 대응이 가능하다. 또, 좋은 채소를 내는 것만큼 우리 식대로 표현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 식대로 색이 나야 하고, 예뻐야 한다.



공간 기획에서도 자연이 묻어난다.
옥인다실의 이혜진 대표가 기획하고, 카인드건축에서 완성한 공간이다. 레스토랑을 기획할 때 “농장의 느낌을 그대로 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건축가분들이 직접 와니농장에 와서 밭과 한옥집을 보고 갔다. 이곳의 흙벽이나 테이블의 질감, 색감은 두 그곳에서 따온 것이다. 공간이나 기물도 요리를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다.

어릴 때 밭을 뛰어놀며 자란 시간은 어떤 자산이 되었나.
나는 1979년생인데, 당시 군포는 소달구지가 다니는 농촌이었다. 집이 종갓집이라 두루마기 입은 어른들이 계시고, 거의 맨날 제사를 지냈다. 열 살 즈음 전철이 개통되고, 1990년대에야 주변에 신도시가 들어섰다.

어릴 때는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신식 건물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경험이 모두 자산이 됐다. 지금 내가 남들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비결도 그 덕분이다. 유럽의 유명한 식당들에서 일했고, 많은 대가들에게 배웠지만, 어렸을 때의 경험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배운 것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7~8살 때까지의 환경이 나를 지배한다고 느낀다.



셰프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다큐멘터리를 봤다. 흰옷을 차려입은 유럽의 셰프들이었는데, 멋있고 화려해 보였다. 이렇게 고생스러운지 모르고. 그래서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가 아버지께 엄청나게 혼났다. 말 그대로 밥상이 엎어졌다. 군대 다녀와서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맡다가 주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몇 년 정도 일했는데, 이상하게 선배들이 만든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는 거다. 손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만 쫓아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유럽으로 넘어갔다. 첫 직장은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의 파인다이닝 ‘무가 리츠’였는데, 매일 오전 7시에 산에 올라가서 채소를 수확하고, 작물을 채집해 요리하는 곳이었다. 이후 13년 동안 유럽에 있는 동안 우연치 않게 비슷한 철학의 레스토랑들을 거쳤고, 요리 스타일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서 일하는 동안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기술’은 오래 하면 얻을 수 있다.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말이 있다. ‘기술은 도구다’라는 말이다. 맛을 올리기 위한 도구로 기술이 앞서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칼질도 최소한으로 하려고 한다. 칼질을 할수록 재료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다면.
함께 일하지는 않았지만 늘 조언을 해주셨던 분이 있다.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아스트랑스’의 파스칼 바흐보다. 내가 ‘라 비’에서 수석 셰프가 됐을 참인데, 당시 아시아인으로서 드물게 높은 직책이었다. 부담감 때문인지 방어적으로 전임자의 음식 스타일을 답습하게 되더라. 그때 하스칼 바흐보가 해준 말을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새기고 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잊으면 안 된다”. 사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인가.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데, 다른 사람의 기술과 철학을 따라가면 ‘카피’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내가 살아오지 않은 삶이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다. 특별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고, 그곳에서 키운 채소로 요리를 할 수 있으니. 지금 레스토랑이 위치한 곳이 회현동인데, 알고 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의 본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 집을 ‘회현 정씨’ 라고 불렀다더라. 이 모든 것들이 순환되는 것 같다.



기가스 요리의 특징은.
지중해식은 양념을 많이 하지 않고 채소와 오일, 해산물을 풍부하게 쓴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서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덕분에 먹고 나서도 속이 편하다. 그 큰 틀을 따와서 재료 자체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지금은 여기에서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맛을 비틀기 시작했다. 재료가 가진 특징 중에서 더 살리고 싶은 포인트를 끌어내는 것이다. 테크닉과 정성을 가지고 집중하면 맛이 올라간다.

플레이팅은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
어릴 때 시골집에서의 익숙한 장면이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 느낌을 담아낸다. 버섯과 오징어 디쉬도 그렇다. 어머니가 우산이끼를 키우시는데, 그 위에 맨발로 앉아있으면 포근하니 마음이 편하다. 그 느낌을 표현해서 플레이팅 했다. 가끔 손님 중에 ‘자녀에게 요리를 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는 분이 있다. 그러면 부모님이 집에서 밥을 해주는지, 외식이 아니라 집밥을 먹는 문화가 있는지를 묻는다. 최소한 그런 문화와 환경이 있어야 요리에 묻어나온다고 생각한다. 영감을 받기 위해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은 결국 카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셰프로서의 지향점은.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을 거친 셰프들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렇지만 소수만이 자신의 식당을 차릴 수 있고, 극소수만이 자신만의 것을 표현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유럽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자신을 최대한 표현하는 식당, 그것을 소비자가 느끼도록 잘 전달하고, 오랜 손님들을 소중히 여기는 곳들이 오래 가더라. 그렇게 기본에 충실하려고 한다.

김은아 한경매거진 기자 una.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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