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쓸며 의지를 다지는 일입니다.”

지난 6일 강원도 원주시 뮤지엄 산, 맨발 차림의 이배 작가가 싸리비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흙으로 뒤덮인 무대에 올라선 그는 빗자루를 붓 삼아 흔적을 새겼다. 뮤지엄 산에서 진행되는 그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의 시작을 여는 퍼포먼스였다. 작가가 밟고 선 흙은 그의 고향 청도에서 가져왔다. 무대 역시 고향의 논을 본따 축소판으로 만든 것이다.
이배 작가의 30년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가 뮤지엄 산에서 열린다. 회화부터 조각, 설치 미술, 영상까지 숯을 매개로 한 39점의 작품이 소개되는 자리다. 뮤지엄 산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한국 작가의 개인전이기도 하다.
실내는 물론 야외 공간에 전시된 작품들은 강원도 치악산과 크고 작은 봉우리의 능선,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공간과 어우러진다. 관람객은 본관 입구에서 시작해 갤러리 로비와 청조갤러리 1, 2, 3을 거쳐 야외 ‘무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개의 공간을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기다림’은 이번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줄기다. 흔히 기다림은 수동적인 행위로 치부된다. 프랑스 소설가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주인공들처럼 결코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린다거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체념으로 읽히곤 한다. 하지만 이배 작가는 오히려 이 기다림을 능동적 행위로 해석한다.

경북 청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씨앗을 뿌리고, 곡식이 익어 결실을 맺을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시간과 예술가의 시간을 동일하게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자연을 신뢰하고, 결국에는 오고야 마는 순리를 지켜보는 이 능동적 기다림은 노자의 무위와 깊게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스무 번도 넘게 전시장을 찾았다. 모든 계절을 경험하며 자신의본질과 현실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40년간 해외를 오가며 마치 떠돌이처럼 살다 고향으로 돌아가니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하신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제 근원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했습니다”

본관 입구에서부터 압도적인 스케일로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불로부터(Issu du feu)’. 지난 2023년 뉴욕 맨해튼의 중심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높이 8m, 지름 5m, 무게 7t에 달하는 이 새까만 숯 기둥은 작가의 고향 청도에서 보던 고인돌에서 영감을 얻었다. 느티나무로 만든 이 숯은 청도의 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숯을 만드는 과정 역시 기다림의 연속이다. 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마에 적당한 온도의 불이 오르기까지 2주, 숯을 식히는데만 2주 해서 꼬박 한 달이 걸린다.

야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브론즈 조각 ‘붓질(Brushstroke)’. 전시의 마지막 동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작품은 높이만 10m가 넘는다. 뮤지엄 산 건물과 주변 산세의 높이와 호응하도록 제작된 이 조각을 설치하기 위해 집을 짓듯이 3m 이상의 바닥을 파내야 했다고 뮤지엄 산 관계자는 전했다.
청조갤러리 로비에는 벽에 걸려 있어야 할 회화 작품들이 마치 설치 작품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 공간에 소개된 총 16점의 작품은 작가의 체중과 붓질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표현됐다. 또, 모두 같은 검정색처럼 보여도 먹을 만든 숯이 어떤 나무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색을 확인할 수 있다.


맨발로 나타난 작가처럼 청조갤러리 1 <White>와 청조갤러리 2
작가의 고향 청도에도 그의 붓질이 아로새겨졌다. 그의 붓질을 형상화한 조각이 대산저수지 위를 부유하듯 떠 있다. 전시장에서는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영상을 확인할수 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원주=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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