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처음 마주한 건 2023년 7월 제주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그와 만찬 테이블에서 2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막힘 없는 그의 발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당시 고대역폭메모리(HBM)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SK하이닉스에 대한 평가다. “수학 한 과목(HBM)은 잘했는데, 그렇다고 전교 1등(메모리 1위)은 아니잖아요.” 자신감과 자만에 대한 경계심이 함께 묻어 있는 솔직한 발언에 ‘열려 있는 재벌 총수’란 생각이 들었다.해외에선 기업 오너, CEO의 잦은 대외 행보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로 유명한 젠슨 황은 말할 것도 없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젠슨 황 못지않다. 매 분기 콘퍼런스콜에 등장하기 전 5분 정도 트는 일렉트로닉댄스음악(EDM)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다. 기업설명회(IR) 행사에서 애널리스트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함을 나타내는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리사 수 AMD CEO의 모습도 한국 서학 개미에게 이젠 익숙한 광경이다.
한국은 달랐다. 기업사를 보면 주요 총수, CEO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직원과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까. 외부 활동보다 사업에 몰두해 회사 키우는 걸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은둔의 경영자’란 수식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성과도 나온다. 젠슨 황,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인공지능(AI) 반도체 삼각 동맹’을 제안한 것도 최 회장이라고 한다. 결과는 아는 대로다. SK하이닉스는 삼각 동맹을 바탕으로 최근 2~3년 HBM 시장을 주도했다.
최근 최 회장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 테크 거물들의 응원 문구가 적힌 깁스 사진을 SNS에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8주 전, 나보다 키도 커지고 힘도 세진 아들과 테니스 치다가 손목뼈에 금이 갔다’는 TMI(과한 개인 정보)까지 곁들였다. 그런데도 최 회장에 대해 과거처럼 ‘오버한다’는 반응이 없는 건 왜일까. 깁스 사진을 통해 빅테크와 ‘AI 반도체 동맹’을 강조하고 싶은 최 회장의 뜻을 사람들이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 간 긴밀한 협업·분업이 AI 패권을 결정하는 시대, 총수의 활발한 대외 활동은 더 이상 흠이 아니라 회사의 경쟁력이 되고 있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