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15일 10:5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자본시장분과위원으로서 참석한 금융발전심의회 전체 회의에서 논의된 핵심은 제도 설계나 규제의 미세 조정이 아니었다. “자본시장의 신뢰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논의를 통해 확인된 공통된 인식은 분명했다. 생산적 금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본시장의 신뢰와 회계투명성이 전제돼야 하며, 이를 위해 각 주체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수행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이 같은 문제의식은 금융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회계·감사 품질 제고 방안에도 담겨 있다. 정책의 방향은 규제를 단순히 늘리는 데 있지 않다. 회계 왜곡의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줄이고,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며, 정보를 숨기기 어려운 환경을 통해 시장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다. 회계와 감사는 규제 대응의 수단을 넘어, 자본시장의 신뢰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로 기능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16세기 화가 캥탱 마시의 〈환전업자와 그의 아내〉(1514)는 적절한 비유다. 이 그림 속 환전업자는 저울로 동전을 재며 미세한 차이를 가늠하고 있고, 그의 곁에 앉은 아내는 성서를 들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동전과 저울을 향하고 있다. 정확한 계산과 윤리적 판단은 늘 긴장 관계에 놓여 있으며, 돈을 다루는 행위는 결코 가치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장면은 오늘날 회계와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숫자를 다룬다는 것은 단순한 계산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정직성과 책임의 문제다. 저울이 아주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는 순간 신뢰는 즉각 훼손된다. 재무정보의 공정성과 독립성, 그리고 그 숫자를 다루는 이들의 태도가 자본시장의 신뢰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인 이유다.
오늘날 자본시장이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투자자들은 더 이상 ‘보기 좋은 숫자’ 그 자체에만 반응하지 않는다. 숫자가 만들어진 배경과 가정, 주요 의사결정의 흐름, 그리고 기업에 불리한 요소까지 설명 가능한 구조를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회계투명성은 특정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조직과 지배구조 전반의 작동 방식에 관한 문제다.
경영진 가운데에서도 CEO의 역할은 회계투명성 구조를 형성하는 출발점에 놓여 있다. 회계는 재무조직의 기술적 산출물이기보다 CEO가 설정한 경영 방향과 판단 기준이 축적돼 드러나는 결과에 가깝다. CFO가 이를 숫자로 구현해 시장과 소통하더라도, 회계투명성의 방향과 깊이는 결국 CEO가 회계를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지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문 회계 인력과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무형의 신뢰 자산을 구축하는 기반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재무정보가 시장과 의미 있게 소통하는 언어로 기능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미국 상장회사 회계감독위원회(PCAOB)의 감사기준에 따른 감사와 감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사전질의 프로세스, 그리고 미국 IPO 감사 및 회계자문 업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국 자본시장은 회계기준의 엄격함 그 자체보다, 회계와 공시에 대해 기업이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 다시 말해 조직 전반의 통제 환경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불리한 숫자 앞에서 설명을 미루거나 판단을 유보할 경우 규제기관과 시장의 신뢰는 빠르게 약화된다. 반대로 경영진이 판단의 배경과 잠재적 위험을 충분히 설명할 때, 시장은 해당 이슈를 기업이 관리할 수 있는지에 보다 주목한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회계투명성은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대응 방식과 역할 수행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으며, 지속적인 회계 인력과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비용이 아닌 건전한 통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감사위원회는 이러한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점검하고 견제하는 핵심 장치다. 단순히 결과를 승인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충분하지 않다. 경영 판단이 숫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취약한 지점은 무엇인지, 외부 이해관계자가 오해할 소지가 없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질문해야 한다. 감사위원회의 역할은 사후 확인이 아니라, 설명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점검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회계법인의 역할도 역시 명확하다. 감사 품질의 본질은 문제를 얼마나 적시에, 그리고 적절한 방식으로 식별하고 제기하며 이를 검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문제 제기가 늦어지면 신뢰는 훼손되고, 지나치게 성급하면 더 큰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감사는 과거를 확인하는 절차에 머물지 않는다. 기업과 시장 사이의 신뢰 간극을 줄이는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온전히 구현된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최근 감사 현장에서는 저가 수임 경쟁으로 인해 투입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부담이 특정 시기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회계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기대는 높아지고 있지만, 전문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은 상대적으로 취약해지고 있는 구조다. 회계투명성은 개인의 윤리나 의지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는 시스템의 결과이며, 판단의 정확성과 적시성을 요구한다면 그 판단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하는 환경 또한 함께 설계돼야 한다.
정책당국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회계투명성의 질서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기업과 회계법인 등 시장 참여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면서, 각 주체가 합리적 근거에 기반해 내린 전문적 판단을 존중하고 이를 제도 안에서 살려내는 접근이 필요하다. 제재의 강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계투명성 기준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선량한 기업과 투자자는 보호받고, 회계투명성은 도덕적 요구를 넘어 자본시장의 기본 조건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회계투명성은 어느 한 주체의 의지로 완성되지 않는다. CEO를 중심으로 한 경영진의 판단, 회계 인력과 인프라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CFO의 숫자 구현과 소통, 감사위원회의 질문과 견제, 회계법인의 검증, 그리고 정책당국의 일관된 기준이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성과를 낸다. 어느 하나라도 흔들릴 경우 회계투명성은 선언에 그치고, 자본시장의 신뢰는 구조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 이는 회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지배구조 생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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