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가격에 구축을 사는 게 상투 잡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도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된 단지들의 분양가를 보고 있으면,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도 들고요. 구축 매매를 하느니 당첨만 되면 수십억원의 시세 차익이 보장되는 분양가 상한제 단지에 올인하는 게 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50대 직장인 A씨)
서울시 서초구에 거주하는 5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고민 끝에 아파트 매수 계획을 잠정 중단했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하며 모은 현금과 기존 자산을 합쳐 강남권 입성을 노렸지만, 막상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준공된 지 20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 가격이 30억원을 훌쩍 넘는데, 여기에 억대의 취득세와 리모델링 비용까지 고려하면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된 단지들 청약에 계속해서 도전할 계획이다.
최근 서울 핵심지 부동산 시장에서 매매 시장은 얼어붙고 청약 시장만 달아오르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고금리와 대출 규제로 기존 주택 매매 동력이 사라진 가운데,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된 '로또 청약'이 현금 부자 무주택자의 눈길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서초 거래량 '반토막'…고가 아파트값 2년 만에 하락
서울 핵심지의 매매 시장은 가파른 가격 상승에 따른 피로감이 누적되며 매수세가 확연히 위축됐다. 특히 강남권 아파트 시장은 '거래 절벽' 수준이다. 서울 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강남 아파트 거래량은 지난해 6월 542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거래량은 15억원을 초과하는 아파트에 대한 추가적인 대출 제한이 포함된 10·15 대책 발표 이후 100~200건대에 머물렀고, 지난 1월엔 205건, 2월엔 150건, 3월엔 130건으로 내려앉았다.서초구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6월 324건이던 거래량은 지난 1월 150건, 2월 138건으로 줄었다. 지난달엔 단 84건만 신고되며 거래가 침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매매 시장 침체는 견고하던 가격에도 영향을 줬다. KB부동산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3월 서울 상위 20%(5분위) 아파트 평균 가격은 34억6065만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월(34억7120만원) 대비 약 1055만원 하락한 것이다. 서울 초고가 아파트 평균 가격이 전월 대비 하락한 것은 2024년 2월 이후 약 2년1개월 만이다.

매매 시장에 도는 냉기와는 대조적으로 청약 시장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온기가 돌고 있다. 매매 시장에서 관망세를 보이던 이들이 청약 시장에는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역대급 경쟁률이 속출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일 1순위 청약을 진행한 서초구 '아크로 드 서초'다. 이 단지는 평균 경쟁률이 1099.1 대 1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돼 인근 시세 대비 분양가가 저렴하게 책정된 영향이다. 당첨 시 17억원가량의 시세 차익이 기대되면서, 현금 부자가 대거 몰렸다.
최근 분양한 서초구 '오티에르 반포'도 43가구 모집에 3만540명이 접수해 평균 710.2 대 1을 기록했고, 용산구 이촌동 '이촌 르엘'에도 78가구 모집에 1만528명이 몰려 19.6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서울 아파트 시장 극과 극…현금 부자 선택이 갈랐다
이처럼 서울 아파트 시장이 상반된 분위기를 띄게 된 원인으로는 대출 규제와 세제 압박이 꼽힌다. 지난해 발표된 '10·15 대책'에 따라 15억원 초과 아파트는 대출 한도가 4억원으로, 25억원이 넘는 아파트는 2억원으로 제한됐다. 사실상 서울 주요 입지의 아파트는 대출 없이 '현금'을 들고 있어야 살 수 있는 구조가 됐다.자금력이 충분한 무주택자는 감가상각이 진행 중인 구축을 사기보다 분양가 상한제로 안전마진이 확보된 신축 단지에 청약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신축 단지에 청약하는 것이 자산 증식 측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대출 규제가 고가 주택 매매 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이면서 실거주 수요가 청약 시장으로 이동한 측면이 있다"며 "특히 50대 이상 자산가 사이에서는 불확실한 구축 매매보다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는 '로또 청약'을 기다리는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매매 시장의 거래 절벽이 길어지고 가격 약세가 심화할 경우, 청약 시장으로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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