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이런 기업가가 있었나"…호평 쏟아졌다

입력 2026-04-19 16:57   수정 2026-04-20 12:10


“정부의 권력은 피치자(被治者), 즉 다스림을 받는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 제1회 한인 자유대회 연단에 선 한 청년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훗날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될 서구 민주주의 정수를 스물넷의 나이에 이미 설파하고 있었던 이 청년은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1895~1971) 박사. 그는 조국을 잊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본명 ‘일형’을 ‘일한(一韓)’으로 고쳐 부르고, 미국에서 일군 탄탄한 기업과 상류층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뒤로하고 조국으로 향했다.

창작 웹툰 <NEW 일한>은 바로 이 지점, 가장 엄혹한 시절에 가장 근대적인 삶을 스스로 선택한 한 인간의 선명한 궤적에서 시작된다. 작품 속 드라마 투자를 결정하는 피칭 현장에서 주인공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대신 유일한 박사를 ‘시대를 잇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작품의 창작자는 <이끼> <미생> 등으로 유명한 국민 웹툰 작가 윤태호(57)다. 그는 지난 15일 인터뷰에서 “왜 존경하는 인물을 항상 먼 과거에서만 찾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며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라도 치열하게 살았다면 충분히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예술이 영웅을 다루는 오랜 관습은 대개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근현대 인물들이 이야기 밖으로 밀려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간적 거리가 멀어야 서사가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윤 작가는 이를 ‘서사적 리스크’라고 표현한다. “영웅은 멀수록 좋아요. 마음껏 은유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근현대이거나 생존 인물일 경우, 왜곡의 문제 등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윤 작가가 위험한 도전을 택한 것은 유한양행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젊은 세대에게 그의 정신을 전해달라는 제안을 받으면서부터다.

“유 박사님과 유한양행은 ‘안티푸라민’이나 버드나무 로고처럼 우리에게 친숙했고,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정말 탐나는 서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박사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인물은 드물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아홉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 식품 기업으로 자수성가한 ‘찐 엘리트’였지만,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동포를 위해 귀국해 1926년 유한양행을 세웠다. 50대의 나이에 일본을 무력화하기 위한 비밀첩보작전(OSS)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재산과 회사를 가족에게 물려주는 대신 사회에 환원하며 재벌이 되기를 거부했다. 윤 작가는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애국심과 가치관이 평생을 지배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직접 구현해냈다는 점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 작가는 창작 과정을 두고 “지옥 같았다”고 회상한다. 유 박사가 그 흔한 자서전 하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작가는 주변인의 증언과 전기를 수없이 반복해 읽으며 유 박사가 내린 결정들의 ‘숨겨진 동기’를 추적해야 했다. 8회라는 한정된 분량 속에서 인간 유일한을 그려내기 위해, 윤 작가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를 조명하지만,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주인공은 현대의 인물이다. 유일한의 삶을 드라마로 제작하기 위해 방송국에 프레젠테이션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기나 일화를 읽어보면 우리나라에 이런 기업가가 있었나 싶은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유일한이라는 인물의 생각을 억지로 그려낼 수는 없었어요. 한참 고심하다 ‘아예 나처럼 모르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자’고 결심했죠. 우리 시대의 영웅을 아까워하면서도 피상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입장으로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지난 18일 웹툰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연재를 마친 <NEW 일한>에는 독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유한동산의 울타리를 치지 말라던 유언이나, 개명에 담긴 뜻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적인 면모가 감동을 준다는 반응이 다수다.

이야기는 이제 AI(인공지능)의 대두와 기후 위기 등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로 이어진다. 유 박사의 삶이 어떤 의미가 되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윤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유 박사님이 살았던 때보다 더한 불확실성이 또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을 스스로 경영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실제로 해낸 모델이 바로 유일한입니다. 그가 더 많은 사람에게 삶의 선명한 지도이자 이정표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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