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자에 대한 배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해외에서는 부채 상환을 위한 유상증자를 기업가치 회복을 위한 주주와 기업의 공동 과제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독일 루프트한자도 롤스로이스홀딩스와 비슷한 사례다. 이 회사는 2021년 정부 구제금융 상환을 위해 15억유로를 조달했다. 고금리 부채를 자본으로 대체해 금융 비용을 절감하고 경영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증자 이후 재무 지표가 정상화됐고 신용등급 전망도 올라갔다.
국내에서도 재무구조 개선 증자가 기업가치의 변곡점이 된 사례가 적잖다. 삼성중공업은 2021년 자본잠식 위기 속에서 단행한 1조3000억원 규모 증자를 통해 재무 리스크를 털어내고 수주 경쟁력을 회복했다. 이후 조선업황 회복에 힘입어 지난해 영업이익 8622억원을 달성했다. 주가 역시 최근 2만원대 후반까지 오르며 증자 발행가(5300원) 대비 4배 넘게 상승했다.
중점심사제를 앞세워 금융당국이 기업 증자의 적정성을 일일이 점검하는 한국과 분위기가 다르다. 과거 금융당국은 자금 사용처가 불분명한 때만 중점심사에 나섰다. 하지만 최근에는 채무 상환 비중과 지분 희석 등을 이유로 정정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업의 긴급한 의사결정을 지연시키는 ‘행정 리스크’가 자본시장의 역동성을 해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국내 대기업 특유의 폐쇄적 지배구조와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분율이 낮은 대주주가 증자를 통해 개인투자자의 자금을 동원하는 행태가 반복돼 개인투자자의 경계심이 깊어졌다는 지적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 등으로 이사회의 주주 충실 의무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며 “행정적 제동보다 지배구조 선진화를 통해 해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발행 규모가 시가총액의 20%를 넘어서는 대규모 증자는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도록 강제하는 영국 모델 등을 참고할 만하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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