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찾습니다. 도시의 혈관처럼 뻗은 물길을 따라 곤돌라를 타고, 산마르코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길을 잃지요.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전인 베네치아비엔날레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네치아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곳을 떠나며 관광객들은 말합니다. "참 낭만적인 곳이야."
하지만 500년 전 이 도시의 이미지는 정반대였습니다. 지중해 무역을 휘어잡고 막대한 돈을 빨아들이던 부자 나라. 도심 한복판에서 매일 군함이 한 척씩 생산되던 군사 강국. 1100년 동안 단 한 번도 본섬이 외국군에 함락된 적 없는, 주변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지요.
그때와 지금 변하지 않은 것은 딱 두 가지뿐입니다. 도시의 풍경, 그리고 이곳이 '예술의 도시'라는 사실. 이 도시에서 나온 그림들은 비슷한 시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못지않게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벨라스케스도, 렘브란트도, 인상주의 화가들도 사실은 모두 베네치아 화파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베네치아 화파의 최고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가 있었습니다. 오는 9일 베네치아에서 개막하는 베네치아비엔날레를 앞두고, 이번 주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베네치아와 티치아노의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정착해야 했던 사람들은 꾀를 냈습니다. 물렁물렁한 땅에 기다란 말뚝을 빽빽하게 박아 단단한 층에 고정하고, 그 위에 돌을 깔아 건물을 짓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게 꽤 괜찮았습니다. 일단 늪지대 위에 지은 도시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대가 침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 바다의 깊이가 얕아서 큰 군함은 들어오기 어려웠고, 작은 배들도 미로 같은 모래톱을 피하지 못해 좌초하기 쉬웠지요. 자연이 만들어준 이런 방어벽 덕분에 베네치아는 1797년 나폴레옹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1100년 간 단 한 번도 외세에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도시가 안전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진짜 강점은 위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동쪽 알프스산맥 바로 아래 위치한 덕분에, 이슬람 상인들이 전해주는 동방의 물건을 받아서 알프스 너머 유럽으로 보내기에 최적이었거든요.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는 비싼 값에 향신료와 비단을 사줬습니다. 그렇게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고,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자 도시가 됐습니다.
이 돈으로 베네치아는 해군을 키웠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에 세운 조선소 겸 군수공장, 아르세날레(Arsenale)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최대 규모 조선소인 이곳에서는 전성기 기준으로 매일 한 척씩 대형 군함을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 같은 큰 나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정치도 베네치아의 번영에 한몫했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베네치아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도제라는 최고 지도자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요 가문들이 합의해 결정을 내리는 일종의 공화정이었지요. 권력의 쏠림이 없으니 정책이 잘 바뀌지 않았고, 그 덕분에 상인들은 안심하고 사업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예술은 이렇게 평화롭고 부가 쌓인 곳에서 꽃피웠습니다. 돈이 넘쳐나는 귀족들과 상인들, 교회는 화려한 그림들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유럽 최고의 화가들이 그림을 팔기 위해 베네치아로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서 베네치아 화파(畵派)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바로 티치아노였습니다.

이 시대 이탈리아의 미술은 크게 피렌체파와 베네치아파 두 갈래로 갈려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피렌체파에 속합니다. 이들은 최대한 정확한 형태를 그리는 걸 중요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인체 해부학을 공부하고, 원근법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선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그었습니다. 반면 베네치아파는 색채를 중시했습니다. 정확한 선보다 생생한 빛과 색감, 분위기를 더 중요하게 봤지요.
이런 차이가 생긴 데는 도시의 환경도 한몫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좋은 안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다양한 색을 일상적으로 늘 접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청금석으로 만든 깊은 파랑(울트라마린), 아랍에서 들여온 진한 빨강(주사·朱砂)과 황금빛 노랑이 시장에 언제나 넘실댔습니다. 운하에 반사된 햇빛,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도 색채 감각을 자극했습니다. 덕분에 베네치아 화가들은 빛과 색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해졌습니다. 색채를 중시하는 이들의 노선은 17세기 루벤스와 렘브란트에게로, 19세기 들라크루아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벨리니 형제 밑에서 베네치아 화파의 기법을 배우고 갈고 닦기를 20여년. 30대 초반이 된 티치아노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잡습니다. 스승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베네치아의 공식 화가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그동안 뛰어난 실력과 착실함을 인정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티치아노는 곧바로 진짜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1518년 5월에 공개한 '성모 승천'.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의 제단을 위해 그린 높이 7m의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전까지 종교화는 차분하고 점잖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은 정반대였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사도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팔을 위로 뻗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습니다. 성모는 단순히 떠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위로 솟구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옷자락은 휘날리고, 빨강과 황금빛은 화면을 폭발시키듯 강렬했지요. 베네치아 사람들은 마치 평생 흑백 다큐멘터리만 보다가 갑자기 4D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본 듯한 충격을 느꼈을 겁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림을 발주한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도 이 그림을 보고 구입을 망설였다고 합니다. "성모가 너무 격렬하게 움직인다" "사도들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그런데 마침 이 그림을 본 신성로마제국 외교관이 "그렇다면 우리가 사겠다"고 나섰고, 수도사들은 황급히 마음을 바꿔 그림을 사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얘기입니다.
이 한 점의 그림은 베네치아 미술의 흐름을 단번에 바꿨습니다. 그동안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 분위기는 다소 차분한 편이었지만, 이후 강렬한 운동감과 극적인 감정이 더해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티치아노는 떼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돈을 고향의 목재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이 나무들은 베네치아 해군의 군함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투자가 크게 성공한 덕분에 티치아노는 30대에 베네치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됐습니다. 당시 그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화가"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변방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른 그의 삶은,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성공 과정과 닮아 있었습니다.

카를 5세는 티치아노를 총애했습니다. “오직 티치아노만 내 초상화를 그릴 수 있노라.”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티치아노는 자주 베네치아를 떠나 황제의 곁으로 향했습니다. 1548년에는 전설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황제의 초상을 그리던 티치아노가 작업 도중 붓을 떨어뜨리자, 카를 5세가 직접 허리를 굽혀 그 붓을 주워 건넨 겁니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황제는 한마디 했습니다. "황제는 많이 만들 수 있어도, 티치아노는 한 명뿐이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스페인 마드리드와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 로마 교황청, 프랑스 파리의 왕실에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여기서 수많은 후배 화가들이 태어났습니다. 50년 뒤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던 벨라스케스는 매일 티치아노 그림을 보고 자랐습니다. 같은 시기 플랑드르의 루벤스는 스페인 왕실에서 본 티치아노에 충격받아 그를 모사하며 공부했지요. 그로부터 200년 뒤엔 들라크루아가 티치아노의 작품 앞에 섰습니다. 후배 화가들은 생각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림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 그림을 뛰어넘고야 말겠어.'
인상주의 역시 이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350년 뒤 프랑스 화가 마네는 이 그림을 소재로 ‘올랭피아’를 그렸고, 이후 그의 뒤를 따라 인상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됩니다. 베네치아가 향신료를 알프스 너머로 보내 부를 쌓았듯이,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색을 유럽에 퍼뜨려 서양미술사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베네치아도 점차 옛 영광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닷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면서, 향신료 무역의 중심축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돈은 급격히 쪼그라들었습니다.
흔들리던 베네치아는 1576년 결정타를 맞습니다. 도시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한 겁니다. 베네치아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 나갔습니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88세의 티치아노였습니다.
죽음을 예감해서였을까요. 티치아노는 생애 마지막 몇 달간 자기 무덤에 둘 그림을 직접 그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그린 '피에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특별한 인물이 한 명 더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신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보는 늙은 남자. 바로 티치아노 자신입니다. 그 옆 작은 봉헌 판에는 본인과 둘째 아들 오라치오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 안 돼 페스트는 아끼던 아들 오라치오마저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림은 후배 화가인 팔마 일 조바네가 마무리했고, 그는 그림 한쪽에 라틴어로 한 줄을 적어 넣었습니다. "티치아노가 그리다 만 것을, 팔마가 경의를 담아 완성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1000년 영광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마드리드와 빈의 왕실 컬렉션에서,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의 제단에서, 그리고 그가 끝내지 못한 '피에타'에서.
그리고 베네치아는 문화·관광 도시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유럽 부유층은 휴가철이 되면 '예술의 도시'인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후 지반 침하와 인구 감소 등 여러 위기와 고비가 찾아왔지만 베네치아는 슬기롭게 대응했고, 매년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문화예술 무대가 되었습니다. 연간 관광객은 3000만명에 달합니다. 이런 부활에는 티치아노와 그 후예들이 남긴 그림들이 문화 자산으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는 9일 개막하는 베네치아비엔날레에는 100여 개국의 미술인들이 모입니다. 베네치아가 무역으로 쌓은 부도, 황제가 티치아노에게 내려준 작위도 한 시대를 넘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그림들은 500년이 지나도 살아남아 도시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권력은 짧고, 예술은 깁니다.
<i>**이번 기사는 Titian: His Life(Sheila Hale 지음), Titian: His Life and the Golden Age of Venice(Ian G. Kennedy 지음), The Cambridge Companion to Titian(Patricia Meilman 엮음), Venice: A Maritime Republic(Frederic C. Lane 지음), A History of Venice(John Julius Norwich 지음), Italian Venice: A History(R.J.B. Bosworth 지음), The Lives of the Most Excell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Giorgio Vasari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명화 시리즈>를 완결짓는 4권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출간이 임박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i>
****<i>베네치아비엔날레 취재 출장으로 인해 한 주 쉬어갑니다. 현지에서 기사로 소식 전하겠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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