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잡아놨던 선배와의 저녁 약속을 파기하고 주섬주섬 퇴근 준비를 하는데 팀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유혹합니다. ‘안 되겠는데… 컨디션이 영~’ 하며 과감하게 뿌리칩니다. 회사 문을 나섭니다. 보통걸음으로 20분, 2호선 당산역 코앞에 도착합니다. 오늘 술자리를 두 건이나 물려 ‘치열한 전투’를 피하게 됐다는 뿌듯함이 여유를 가져다 준 걸까요. 발길은 어느새 전철역사가 아닌 한강공원으로 향합니다.
폭우로 인한 범람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강기슭은 그야말로 진흙밭이고 키 작은 풀과 야생화들은 온 몸에 토사를 뒤집어쓴 채 불편하게 흔들립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물웅덩이를 피해갑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주위를 돌아봅니다. 불어난 수량 때문에 고기가 잘 잡히는지 긴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이 평소보다 많은 듯하고요. 잠자리채를 들고 아이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남자, 나무의자에 신문지를 깔고 육신을 편히 뉘인 사내 몇 명도 눈에 들어오는데요.
풍경과 함께 꼬리를 물던 이런저런 생각이 잠시 ‘인간의 관계’에 머뭅니다. 좋은 관계 나쁜 관계, 편한 관계 불편한 관계, 안정된 관계 위험한 관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만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고 하지 않던가. 만약 여기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지금 이 광경은 있을 수 없겠지, 저들도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서로가 서로의 분신으로서 떠받치고 의지해야만 할 숙명일진대 과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걸까. 누군가에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약속도 없으면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양 서성이다가 고개를 드니 열차가 철교 위에 정지한 채 이동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소 전철 안에서 내려다 보이던 자리에 서서 거꾸로 올려다 봅니다. 위치가 바뀌니 마음의 각도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 저 다리! 가까이 가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진 인간 상황의 상징물이자 현실과 이상의 연결구조, 동시에 우리 인생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치!
크로아티아 작가로 1961년 노벨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는 종교와 이념의 괴리를 빗댄 다리고요. 세기의 미남 로버트 테일러와 강한 개성의 비비안 리가 주연, 고전 멜로 영화의 최고 걸작이라는 ‘애수’에 나오는 워터루 브릿지도 만날 수 없는 애틋한 마음과 마음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세계적 베스트 셀러로 영화화돼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중년 남녀의 순정을 양편에 두고 놓여 있지요.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종점 없는 순환선, 정비를 위해 차고로 들어가기 전에는 달려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나도 가야지. 그리운 사람들을 호명하며 수문을 빠져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차고는 어디이며 언제쯤 그곳으로 들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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