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주의(負債主義:Debtism)` 식자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資本主義:Capitlaism)` 대신 경제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다. 한 마디로 `자산`과 `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와 `빚`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경제시스템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공황`과 `부채`가 동면의 앞면처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1990년대 후반 발생한 IT거품과 붕괴,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밀레니엄 버그` 는 인류 역사에 되풀이됐던 `세기말적 현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FRB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하면서 사람들은 `빚`의 무서움을 망각했다. 당시에 오히려 사람들은 환호했다. 앨런 그린스펀은 인류 경제와 시장을 구한 `영웅`의 반열까지 올랐다.
(좌 : 앤서니 기든스, 우:마이클 샌델)
`부채주의` 이전에 자본주의는 새로운 변형을 생산했다. `자본주의 3.0`, `자본주의 4.0`, `따뜻한 시장경제`, 마이클 샌델의 `정의(Jusitce)`까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상당한 반응을 끌어냈다. `정의`의 경우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아이디어로 받아들였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의 끝자락에서 탄생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은 사회민주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며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그 뿌리에 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3의 길`이 `정의`보다 한국에서는 더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두 아이디어 모두 `부채주의`의 출현을 막지 못했다.
IT버블의 붕괴를 막기 위해 시작된 금리인하는 돈의 가격(이자)을 떨어뜨렸고 너도나도 빚을 내서 새로운 자산을 구입하는데 열을 올렸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시장을 호령했던 사모펀드는 이같은 시류를 반영한 `새로운 투자수단`이었다. 빚을 무서워하던 기업 경영진(CEO)와 주주들을 설득하기에 사모펀드는 그 명칭부터 기가막힌 마케팅 수단이었다. 빚을 내서 기업의 우량,비우량 자산을 매입한 뒤 되팔아서 원금과 이자를 갚고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의 정확한 명칭은 `사모부채펀드(Private Debt Fund`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명의 영민함은 시대를 흔들었고 드디어 미국을 이끌던 지도층은 빚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 공감했다. 다음 차례는 중산층이었고 그 여파는 이자도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서브 프라임`이라는 폭탄을 안겼다.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도입하면서 `부의 효과(Wealth Effect)`를 체감한 유럽인들도 빚내서 자산사기 대열에 동참했다. BRICS로 대표되는 신흥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도 물론 예외일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서 시작된 `폭탄 돌리기`는 AIG, 리먼브러더스 뿐만아니라 수백만 미국인의 피눈물을 제물로 삼은 뒤에야 일단락 됐다. 그 직격탄은 곧바로 대서양을 건넜고 `파티`가 끝났음을 그때야 유럽인들은 깨달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제 `유로존 재정,금융위기`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유럽의 사분오열은 대선을 앞두고 한숨을 돌렸던 미국과 승승장구하던 중국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한국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고만 것이다.
한국 경제현상의 큰 흐름도 `부채주의`로 대부분이 설명된다. 개인은 가계부채, 기업은 부실기업 구조조정, 국가는 재정적자와 고령화라고 요약된다. `자산`이 많은 것보다 `부채`가 적거나 `자본(현금)`이 넉넉한 개인과 기업, 국가가 `일류`로 통하는 시대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25일 금융위 간부들과 회의를 하면서 가계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정부 부처와 한국은행의 거시경제 여건 조성을 위한 공동 대응 노력이 강화되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일견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시야를 넓히면 여전히 소극적인 대응자세다. 금융시장과 산업, 규제를 담당하는 금융위와 통화정책을 펼치는 한국은행이 제 아무리 협조를 해본들 `부채주의` 시대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이 `빚 권하는 사회`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빚탕감` 이외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고용노동부,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 보건복지부 등 범 정부 차원의 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발 더 나아가 부채담당부처를 만드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지금은 `모양새`만 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격언을 2012년식으로 바꾸면 `부채는 정부도 구할 수 없다`정도가 될 것이다. 1~2개 정부부처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였다만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에 빚으로 신음하는 곡소리가 메아리쳐도 정부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에는 문제가 없다`는 타령만 되풀이 하고 있다. 최고의 정책은 정직함에서 나온다. 틀린 진단에 맞는 처방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채주의`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한국도 여기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역사는 `공황`과 `부채`가 동면의 앞면처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1990년대 후반 발생한 IT거품과 붕괴,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밀레니엄 버그` 는 인류 역사에 되풀이됐던 `세기말적 현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FRB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하면서 사람들은 `빚`의 무서움을 망각했다. 당시에 오히려 사람들은 환호했다. 앨런 그린스펀은 인류 경제와 시장을 구한 `영웅`의 반열까지 올랐다.
(좌 : 앤서니 기든스, 우:마이클 샌델)
`부채주의` 이전에 자본주의는 새로운 변형을 생산했다. `자본주의 3.0`, `자본주의 4.0`, `따뜻한 시장경제`, 마이클 샌델의 `정의(Jusitce)`까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상당한 반응을 끌어냈다. `정의`의 경우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아이디어로 받아들였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의 끝자락에서 탄생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은 사회민주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며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그 뿌리에 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3의 길`이 `정의`보다 한국에서는 더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두 아이디어 모두 `부채주의`의 출현을 막지 못했다.
IT버블의 붕괴를 막기 위해 시작된 금리인하는 돈의 가격(이자)을 떨어뜨렸고 너도나도 빚을 내서 새로운 자산을 구입하는데 열을 올렸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시장을 호령했던 사모펀드는 이같은 시류를 반영한 `새로운 투자수단`이었다. 빚을 무서워하던 기업 경영진(CEO)와 주주들을 설득하기에 사모펀드는 그 명칭부터 기가막힌 마케팅 수단이었다. 빚을 내서 기업의 우량,비우량 자산을 매입한 뒤 되팔아서 원금과 이자를 갚고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의 정확한 명칭은 `사모부채펀드(Private Debt Fund`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명의 영민함은 시대를 흔들었고 드디어 미국을 이끌던 지도층은 빚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 공감했다. 다음 차례는 중산층이었고 그 여파는 이자도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서브 프라임`이라는 폭탄을 안겼다.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도입하면서 `부의 효과(Wealth Effect)`를 체감한 유럽인들도 빚내서 자산사기 대열에 동참했다. BRICS로 대표되는 신흥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도 물론 예외일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서 시작된 `폭탄 돌리기`는 AIG, 리먼브러더스 뿐만아니라 수백만 미국인의 피눈물을 제물로 삼은 뒤에야 일단락 됐다. 그 직격탄은 곧바로 대서양을 건넜고 `파티`가 끝났음을 그때야 유럽인들은 깨달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제 `유로존 재정,금융위기`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유럽의 사분오열은 대선을 앞두고 한숨을 돌렸던 미국과 승승장구하던 중국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한국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고만 것이다.
한국 경제현상의 큰 흐름도 `부채주의`로 대부분이 설명된다. 개인은 가계부채, 기업은 부실기업 구조조정, 국가는 재정적자와 고령화라고 요약된다. `자산`이 많은 것보다 `부채`가 적거나 `자본(현금)`이 넉넉한 개인과 기업, 국가가 `일류`로 통하는 시대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25일 금융위 간부들과 회의를 하면서 가계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정부 부처와 한국은행의 거시경제 여건 조성을 위한 공동 대응 노력이 강화되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일견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시야를 넓히면 여전히 소극적인 대응자세다. 금융시장과 산업, 규제를 담당하는 금융위와 통화정책을 펼치는 한국은행이 제 아무리 협조를 해본들 `부채주의` 시대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이 `빚 권하는 사회`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빚탕감` 이외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고용노동부,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 보건복지부 등 범 정부 차원의 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발 더 나아가 부채담당부처를 만드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지금은 `모양새`만 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격언을 2012년식으로 바꾸면 `부채는 정부도 구할 수 없다`정도가 될 것이다. 1~2개 정부부처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였다만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에 빚으로 신음하는 곡소리가 메아리쳐도 정부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에는 문제가 없다`는 타령만 되풀이 하고 있다. 최고의 정책은 정직함에서 나온다. 틀린 진단에 맞는 처방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채주의`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한국도 여기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