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PD의 영화 이야기] 김기덕의 아리랑

입력 2012-09-20 15:39   수정 2012-09-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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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PD의 영화 이야기] 김기덕의 아리랑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피에타’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1951년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으로 받았던 상이다. 그 후 동양권 대상 수상은 대만의 허우샤오셴(1989, ‘비정성시’)과 차이밍량(1994, ‘애정만세’),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1997, ‘하나비’), 중국 장이머우(1992, ‘귀주 이야기’, 1999, ‘책상서랍속의 동화’)에 이어 여섯번째다. 과거 동양권 감독 수상작이 과거형 소재로 상을 받았다면 다케시에 이어 김 감독은 지극히 현대적 소재로 상을 받은 것이 이채롭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서양화적 영상 미학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제작 현장에서는 신(神)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임권택 감독(2002, ‘취화선’,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역시 서양화적 색채와 구도에 엄밀하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서양화에 기반한 사진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문예사조적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 앵글이란 것이 1밀리 사이즈, 0.1도 차이가 엄청난 느낌의 차이로 다가오는 것이어서 이 서양회화의 전통을 체득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유럽인들에게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 감독이 유럽에 그림그리러 갔다가 ‘퐁네프의 연인들’(1992, 프랑스)을 본 충격에 영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한국 영화사는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감독 중심 영화 제작 관행이 주된 흐름였다는 이야기다. 변화가 생긴 것은 개인적으로는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1996)’로 본다. 80년대 군사정권아래 지식인들의 저항기재로 한국의 참여주의 문화는 영화계에도 중흥기를 불러왔다. 하지만 돈이 좀 된다싶자 감독중심의 작가주의 영화와 프로듀서 중심의 상업영화간에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그 분기점을 이룬 영화가 ‘은행나무 침대’로 본다는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당시 볼 수 없었던 ‘한국형 블럭버스터’를 표방했고, 미국식 프로듀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작동했던 흥행작이었기 때문이다.

1996년 같은 해에 다소 쌩뚱맞게’ ‘악어’라는 작품을 들고 나온 이가 김기덕 감독이다. 김 감독의 프로타고니스트는 단연코 배우 조재현이다. 한강에 빠진 시체 청소부라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엽기캐릭터를 ‘악어’에서 사실화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항상 변두리였다. 그들이 추구하는 ‘의식’때문였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영화적 사상범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조재현과 자주 어울리는 배우가 차인표다. 이들과 절친한 사람이 ‘화려한 휴가’, ‘목표는 항구다’, ‘제7광구’의 감독 김지훈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하자. 암튼 ‘악어’는 김기덕 특유의 생경함과 ‘유리창을 긁는 손톱소리’ 같은 껄끄러움을 각인시켰다.

김기덕 감독이 수상소감으로 아리랑을 불렀다니 그런 ‘낙인’으로 맺힌 한이 무척 컸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도 다면적으로 수상소감을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 전통 문화에서 한(恨)의 배태와 해소는 전형적인 코드다. 여기에는 개인사가 녹아 있다. 80년대 시인 장정일처럼 무학(無學)의 천재들이 겪는 한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천재가 살아남으려면 입 닥치고 조용히 자기 일만 하던가, 천재성을 포기하든가 두 가지 길밖에는 없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린다. 알아주건, 안 알아 주건간에 그만큼 자기 세계 유지가 어렵다는 말이다. 암튼 한국의 5대 일간지가 1면으로 수상소식을 전했으니 개인적 한이 풀렸으리라 본다. 다른 하나는 아마도 그는 나운규의 ‘아리랑’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일종의 퍼포먼스를 통한 한국영화에 대한 헌사다.

김기덕하면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선 생각나는 이는 판화가 이철수다. 사실 필자는 두 분 이름을 함부로 언급할만한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독자님들이 왕이시라는 믿음과 예를 차리는 마음 한자락으로 일단 그렇게 쓰자. 두 사람은 우선 생긴 것이 닮았다. 전형적인 조선 토종으로 생겼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입가, 게다가 달변이다. 두번째로 이들이 닮은 것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다. 엄밀히는 무척 다르다. 하지만 넓고 묽게 보자면 이들은 제도권과는 다소 유리된 ‘반예술(Anti-Art)’적 성향이 강하다. 다소 노골적이기도 하고, 냉소적인 면도 있다. 동시에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를 녹이는데 관심이 많고, 재능도 탁월한 것 같다. 시적 뉘앙스, 강한 외침도 닮았다. 세번째로 닮은 것이 이들의 가방끈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다. 사실 예술하는 이들이 가방끈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한국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두 사람 모두 스무살 이전에 학교는 정리했다.

판화가 이철수는 요즘에도 나뭇잎 편지라는 것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이철수는 창칼의 달인이다. 보통 판화작가들이 세모칼을 주로 쓴다면 그는 창칼로 선을 능수능란하게 ‘딴다’. 김기덕이 스스로 ‘열등감이 빚어낸 괴물’이라고 한 반면에 이철수는 80년대 ‘죽을 자리만 찾아다녔다’는 과격운동권였다. 하지만 이들이 작품속 변화에서 보인 모습은 단순한 좌파적 저항이라고 보기에는 보다 깊은 종교성을 포괄하고 있다. 고인이 되신 ‘몽실언니’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 80년대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참여문학의 문을 열었고, 사진작가로도 유명한 조세희 선생을 그의 동네 주변에서 뵐 수 있었다. 순수예술주의자들이 참여파 문화인들을 주로 공격할 때 쓰는 방법이 ‘예술적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평가가 어찌되었던가에 김기덕이건 이철수건 유럽에서는 알아준다.

두번째로 떠오르는 얼굴이 조성형이다. 조성형은 연대 85학번 출신으로 독일에 사는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Full metal village’(2006, 다큐멘터리)라는 제목의 영화로 독일 헤센영화상, 슐레지엔 홀슈타인 영화제에서 최고 다큐상을 받았다. 막스 오필스 영화제에서 `막스 오필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성형 이야기를 왜 하냐면 독일 다큐멘터리를 통해 유럽의 영상미학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2008년에 베를린에서 독일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들과 국제 피칭대회겸 국제공동제작 세미나를 하면서 유럽 다큐멘터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하우스에서 열흘간 진행된 세미나에서 한국 프로듀서들은 절반 앞부분 사흘은 졸려 죽는 줄 알았다.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독일 수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후 경제개발 원조 자금을 빌리러 서독에 갔을 때 임기중이었다. 당시 박통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들의 피눈물로 달러가 유입되고 있었으니까. 그런 박정희에게 1964년 12월에 에르하르트는 충고했다고 한다. “일본과 다시 손을 잡으세요.” 이것이 한일수교회담의 출발이 되었고 “원쑤” 일본과 한국은 1965년에 국교를 정상화한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깃든 역사적 건물에서 독일의 다큐멘터리를 접한다 하니 감흥은 새로웠고 기대는 컸건만 실망만 컸다. 미국식 드라마와 일본식 오락물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 프로듀서들이 보기에 유럽의 영상은 ‘노인들만을 위한’것처럼 느리고 물러 터졌다. 하지만 나흘째 되면서부터 유럽식 영상의 힘이 평안하고도 포근하게 감싸왔다. 그리고 그 힘은 굳건했다. 치열함속에 잊고 지냈던 평화와 휴식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에서 처음 접한 조성형이란 이의 ‘Full metal village’는 충격적였다. 굳이 제목을 번역하자면 ‘메탈 음악 충만촌(充滿村)’이다. 샷과 앵글은 헐리웃 수준인데 주인공은 평범한 이웃 주민였던 것이다. 그 가공되지 않은 사실의 힘과 정교한 영상미학에 바로 굴복해야 했다. 다시한번 되뇌였다. “중원은 넓고 고수는 많구나!” 8천킬로를 날아 도착한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그런 고수를 만날줄은 상상을 못했었다.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조성형의 말을 들어보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너무나도 다른 두 문화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무엇이 본래의 것이고 무엇이 외래의 것인가? 두 문화가 충돌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테마는 시작되었다.” (2007년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이 영화는 독일 북부 함부르크 인근 바켄이라는 깡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조용한 촌동네가 1년에 한번씩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마을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바켄 오픈 에어’라는 헤비 메탈 페스티벌 때문이다. 마을은 페스티벌 유치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대립한다. 필자가 기억하는 트레일러중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 회관에서 성가를 부르며 포크 댄스를 추는 할머니들 모습이었다.

다큐라고 믿겨지지 않는 그 웅장한 자연의 풀샷,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름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광활한 전원 풍경은 일반적인 풀샷 런닝타임 8초를 넘어 10초, 아니 20초 가까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내공 충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청바지 작업복 차림의 농부 아저씨의 ‘진솔한’ 인터뷰는 조성연이 왜 독일에서 한국의 고향을 느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골 아저씨의 ‘너털한 육담(肉談)’ 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주말에 홀로 찾은 동독 지역에 위치한 포츠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70년대 한국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분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동독 지역에 과감히 ‘침투’한 나는 숙소인 쉔베르그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가며 타고 돌아가야 하는데 우선은 지하철역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비까지 내려서 어둑해지는데 몹시 불안했고 조급증이 생겼다. 마음은 급한데 시골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서계신 동네 어르신들한테 영어로 물었다. “여기서 역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나요?” 보기 드문 동양인을 처음 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호시탐탐 살피던 노인네들은 초등학생들처럼 얼어붙으며 소리지르듯이 답했다. “예쓰!”

이것이 유럽 정서다. 조성형을 통해 확인한 유럽 영상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겠다. 유럽의 영상창조자들은 현실을 우선 아주 이상적으로 그려낸다. 가공한다는 뜻이 아니고, 현실속에 드물게 숨쉬고 있는 작지만 도달해야 할 이상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려낸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것을 본 이들은 현실을 그 이상에 맞춰 올리려 노력한다. 그리고서 다시 영상창조자들은 더 높은 이상을 그려낸다. 이런 영상과 현실의 순환과정이 무한반복된다. 김기덕은 피에타에서 그런 종류의 씨앗을 던졌을 것이다. 아직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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