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유연한 관계를 위해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다. 그게 인간 앞에 놓인 현실이다. 고로 누구도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면 뒤에 숨겨진 거짓과 배신, 이것이 인간의 삶
‘영혼이 없는 칭찬’을 한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관계의 원만함을 위해 활용되는 가면의 일종인 형식적인 칭찬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말이 생겨날 정도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가면이 존재하는지 열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인간관계에서의 가면은 앞서 언급한 ‘영혼이 없다’는 표현에서도 눈치 챌 수 있듯이, 자아가 가진 진정성을 숨기는 감정 상태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거짓과 배신을 연결하는 아주 직접적인 매개가 된다.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가면과 그 가면 사이에 넘쳐나는 거짓과 배신, 그리고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가면들에 의해 일어나는 갈등의 결과를 ‘죽음과 삶’의 개념에 중심을 두고 풀어나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마쥬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시도 인간이 풀어야 할 숙명적 논제인 죽음과 배신,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원전에서 야기하는 농도 짙은 주제를 다양한 방식들로 풀어나간다.
연극에게 가면이란?
연극에서 가면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인물에 감정이입하지 않게 하기 위함’과 ‘인물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기’ 위한 양가적 효과를 위해서다. 무대 위에서 가면을 쓴 인물은 표정이나 눈빛 등 얼굴을 활용한 표현이 제한된다. 하지만 가면을 통해 고정된 표정은 인물을 드러내는 강력한 정체성이 되고, 얼굴의 표현이 제한된다는 핸디캡은 다른 신체 부위나 음성을 통한 보다 과감한 표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가면으로 인한 리얼리티 하강은 인물에 대한 일면적 감정이입을 배제시켜 거리두기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 때문에 작품은 관객이 인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동시에 뚜렷하게 보도록 유도하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 역시 이러한 가면의 효과를 잘 활용했다.

2015년 서울, 한국의 나무 가면을 통해 다시 태어난 햄릿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망자의 구천을 배웅하는 역할을 하는 네 명의 요정들을 통해 햄릿과 햄릿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된다. 햄릿의 이야기는 요정들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장면들은 나무 가면을 통해 구현된다. 요정 역을 맡은 배우들의 손에 들린 나무 가면은 한국의 탈과 비슷하다. 이때 등장하는 가면들은 다양한 형태로 조정된다. 배우들은 손으로 가면을 조정해 인형극과 같은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고 얼굴에 쓰기도 하며, 발에 탈을 끼워 가면극을 올렸던 조선 후기 발탈과 흡사한 무대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가면은 각기 다른 색채의 천을 연결하여 각 인물을 인형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 등장시켰는데 이는 인물이 처한 현실과 인물의 정서를 강화하는데 일조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미장센은 조명과 조화되어 장면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가장 대표적 장면은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어의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등장한 오필리어는 하얀색의 긴 천을 연결한 인형으로 등장한다. 장면에서는 이 인형을 낚시줄에 매달아 돌려 유령이 구천을 떠도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굿은 마당에서 해야 제 맛!
이 작품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색다른 방식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굿’의 형식을 차용한 점이다. 작품의 처음과 끝은 망자의 혼을 달래는 노래로 시작되었다가 마무리 된다. 이 작품은 장례를 치르며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네 명의 연행자들이 망자의 현세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망자굿’이 연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햄릿’이라는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거대한 굿판이 연극을 대신해 무대 위에 상연된 것이다. 이 작품이 굿판이라는 설정은 무대를 ‘마당화’시켰다는 연출적 맥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배우들이 관객들과 접촉하며 등장하고, 배우들의 시선이 대부분 관객을 향해 있다는 점, 관객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 점은 마당극에서 두드러지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 허물기 개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빈 무대로써 무대세트가 없이 미장센을 보여주는 점이 특이점인데, 무대에 등장한 가장 눈에 띄는 대도구는 요정들이 끌고 나온 꽃수레이다. 꽃수레는 망자를 극락으로 이끌기 위해 태우는 마차로써 굿의 형식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기호로 역할 한다.
인형은 무당이요, 대사는 망자의 말이다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은 한국적 색채인 굿의 형식과 가면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원전과의 괴리가 크다. 하지만 인형들을 통해 쏟아지는 인물들의 대사는 원전에 나오는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다. 현대의 관객이 쉽사리 알아듣기 어려운 셰익스피어 특유의 언어유희가 인형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이 작품이 하나의 거대한 굿이라는 가정 하에 원전의 대사가 인형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은 굿판에서 무당의 입을 통해 망자의 일상어가 여과 없이 나오는 지점과 흡사하다.

노래하듯이 햄릿은 어떻게 햄릿의 인생을 이야기 하나?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의 시의성은 ‘창작자들이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에서부터 풀어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햄릿의 인생을 요정들의 시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관객은 요정들에 의해 재현된 햄릿을 지켜보는 것이다. 요정들이 대상으로서 햄릿을 대하는 자세는 가볍다. 망자의 해골로 공놀이를 하기도 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며, 망자를 보내는 의식을 하면서도 우울함이나 슬픔은 거의 없다. 심지어 웃음기까지 있고 호들갑도 얹어진다. 발랄한 정서를 강화함으로써 햄릿이라는 인간의 주된 화두인 삶과 죽음, 그리고 복수 에 대한 이야기는 객관성이 부여된다. 하지만 표현의 방식으로 채택된 발랄함은 자연스럽게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다. 너무 잦은 웃음과 호들갑으로 넘쳐흐르는 이 공연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한편으로 그 정체성이 흐릿해졌다는 인상도 지우기 어렵다.
게다가 이 작품은 빈 무대에 배우들의 움직임과 약간의 대소도구들로 대부분의 미장센을 만드는 것이 콘셉트인데 내용을 설명하는 대사가 너무 많다. 심지어 그 설명을 앞서 언급한 과장된 발랄함으로 점철된 재미있는 척이 대신한다. ‘척’하는 것과 설명이 많다는 것은 변명이 많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미장센이 많이 준비된 공연인데 설명까지 너무 많이 덧붙이기까지 한 것은 과유불급 이다. 관객의 감정은 언어로써 가이드 한다고 해서 그 가이드대로 따라 오지 않는다. 어릿광대 넷의 블로킹은 한편의 그림이 되어 재미의 여지가 많은 부분인데 설명이 너무 많아 부각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 공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