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얼어붙은 무대, 열렬한 에너지…연극 ‘프로즌’

입력 2015-06-22 16:27  





* 이 기사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랄프는 낸시의 딸 로나를 죽인 연쇄살인범이자 소아성애자다.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는 랄프를 통해 연쇄살인범의 정신분석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녀는 함께 연구하던 동료 교수를 잃고 힘겨워 하면서도 연구발표를 강행한다. 그녀가 랄프를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각해가고 있던 어느 날, 아그네샤를 찾아온 낸시는 랄프를 만나 그를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아그네샤는 허락하지 않는다.

얼어붙은 무대, 열렬한 에너지

연극 ‘프로즌’은 차갑다. 무대 전체를 내리누르는 냉기에 공연 시작 전 객석조차 얼어붙은 듯 고요하다. 전체 무대는 미니멀의 극치다. 정면에는 의자 세 개와 테이블 한 개가 놓여 있고, 뒤편으로는 거대한 모빌과 흡사한 모양새로 비닐에 뚤뚤 말린 소품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비닐의 스산한 이미지는 얼음과 죽음(보통 시체를 보호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의 메타포를 입고 작품 전반에 서늘한 공기를 심어놓는다.

연극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단편적인 여러 개의 장면들로 구성된다. 각 인물들은 자신의 사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후, 극의 3분의 1이 지난 지점에서야 얼굴을 마주한다. 세 사람은 마치 테이블 안에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아예 분리될 수는 없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인다. 각 배역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도 무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물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며 극의 일부로 남아 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얻어진 인물들의 감정은 다음 장면을 연기하는데 ‘리액션’의 자양분으로 활용되며, 텍스트를 더욱 풍부하게 도출해낸다.

작품은 극의 초반부에 인물들의 성향과 사연을 단편적인 프롤로그로 설명한다. 중반부에 들어서야 갈등의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후반부에 이르면 객석 뒤편으로 배수진을 친 채 불도저처럼 각 인물들의 감정을 무섭게 몰아붙인다. 특히, 후반부의 낸시와 랄프의 위태로운 대면, 아그네샤와 랄프의 팽팽한 신경전은 밀집된 감정으로 인해 곧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압박감으로 관객을 내리누른다.

찬바람이 오고가는 단출한 무대 위를 채우는 것은 배우들의 에너지다. 배우들은 내장을 긁어내는 듯한 치밀하고 날카로운 연기로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는다. 미니멀리즘 연극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온 연출가 김광보는 매 작품 배우들의 연기력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으로 높이 평가받아왔다. 이번 연극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연극 ‘프로즌’에서도 배우들의 연기는 그의 작품 최전선으로 나와 있다. 무대나 장치 뒤로 숨을 곳이 없는 배우들은 텍스트에 담긴 가파른 감정의 굴곡을 절박하게 무대 위로 토해내며 강력한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한다.



용서를 마주하는 용기

랄프를 찾아간 낸시는 그를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랄프는 시큰둥하다. 그는 낸시가 보이는 의외의 호의에 호기심으로 갸웃거리며 응대할 뿐이다. 하지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히 대해주는 낸시에게 랄프는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한다. 특히, 랄프가 “당신은 농장에서 살아요? 말을 타고, 시를 읽고, 늘 따뜻한 빵을 먹고?”라고 묻는 대사는 그가 꿈꾸었던 삶이 어떤 것인지 엿보게 해준다. 그의 죄를 용서할 순 없지만, 가장 인간적인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낸시는 언뜻 비친 랄프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리고 학대의 상처를 까뒤집어 놓는다. 그가 자신이 받았던 과거의 고통과 로나의 아픔을 일치시키는 순간, 그의 깊숙한 곳에 얼어 있던 상처들은 물질적 비수로 돌변해 해빙된 심장을 단번에 찔러 버린다.

아그네샤는 두 사람의 면회를 극구 반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랄프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고, ‘용서’가 얼마나 강력한 해빙제인지 알고 있다. 간혹 아그네샤는 랄프에게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눈빛에는 죄를 지은 자로서의 동질감 혹은 전혀 죄를 느끼지 못하는 심리(죄를 외면하고 싶어 하는)에 대한 동의가 담겨있다. 곧, ‘랄프와 낸시의 관계’는 ‘아그네샤와 그녀의 친구’ 관계로 확장된다. 연극 ‘프로즌’은 이처럼 인물들 간에 얽혀 있는 심리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 나가면서 이야기에 더욱 깊이 천착해 나간다.

연극 ‘프로즌’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용서’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수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내가 아는 죄와 내가 모르는 죄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세계는 죄와 죄의 충돌로 퇴적된 땅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죄 중에 우리가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몇 개나 될까.

랄프는 낸시와 면회한 후, 이번엔 스스로 용서를 구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낸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먹이며 분노하며 자신의 심정을 써내려 간다. 하지만 곧 그는 정성들여 쓴 편지를 찢는다. 자신의 죄에 마주설 용기도, 낸시의 용서를 받아들일 배짱이 없기 때문이다. 물러설 곳 없는 그에게 선택지는 단 하나, 죽음뿐이다. 아그네샤는 랄프의 장례식장에서 낸시에게 ‘자신의 잘못을 친구에게 고백해야 하는지’ 묻는다. 낸시는 말한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잖아요. 고통과 함께 살아요.”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죄는 계속될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용서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지독한 추위로부터 얼어붙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용서받고, 용서해야만 한다. 결국, 용서는 죄를 마주보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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