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임대주택 '엘사'란 말 없어지길

신인규 기자

입력 2020-01-24 09:42   수정 2020-01-24 09:43

해당 이미지는 기사에 소개된 실제 사례와 관련이 없습니다
■어디에 살아도 씩씩한 아이들…하지만 조금씩 서먹해진다

윤서(가명)를 만난 곳은 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기자 아저씨의 질문에 대답하던 윤서는 `어디 사는지`를 묻는 질문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챘습니다.

또래보다 덩치가 좋은 윤서는 영리하고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아직도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놀리는 애들이 있냐는 말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도 자기를 놀렸지만 이제는 친하다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다시 친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윤서는 이제는 자기가 말을 걸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윤서가 다니는 학교는 소송에 휘말려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곳으로 학군을 배정받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해당 교육지청에 `통학구역결정처분취소 청구의 소`라는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배정해달라는 소송입니다.

그런데 소송 취지가 석연찮은 면이 있습니다. 원고인 학부모들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는 통학로와 교실에서 나오는 전자파 수치가 너무 높다는 겁니다.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해 해당 교육지청이 통학구역을 합리적으로 결정했고, 전자파도 기준치를 초과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학부모들은 항소했고,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가 오는 2월 초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현장에서는 1심 판결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은 내용에 대한 목소리가 나옵니다. 특정 학부모들이 이 학교를 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학부모들이 이 이유로 소송을 건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이 지역을 살다 보면 체득하게 되는 분위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현 임대주택 시스템…스스로 만든 함정 없나 돌아봐야

지난해 말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엘사`라는 말이 돕니다. 정부가 공급한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몇 년 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아파트 브랜드에 사는 이들을 속되게 `휴거`라고 놀리던 것이 변주된 겁니다. 놀리는 단어만 달라졌을 뿐,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이 부분에서는 성숙하지 않았다고 보면 비약일까요. 빌라에 사는 아이들을 조롱하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는데, 나쁜 말 하는 아이들만 뭐라고 해서 될 일일까요.

1989년 우리나라에 첫 임대주택 단지가 설립됐던 초기와 달리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임대주택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차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을까. 정부나 관련 공기업의 담당자들도 쉽게 해답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경제 구조를 탓하고 시민 문화를 탓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공무원이 할 일은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셜 믹스`라는 정책이 만들어놓은 흔적들을 살펴봅니다. 집값이 그렇게 비싸다는 서울 강남, 재개발·재건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아파트 섬 어딘가에 누구나 알 수 있게 임대동이 지어집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은 으리으리한 커뮤니티 시설을 자랑하지만, 임대동 주민은 이용하기 어렵도록 한 곳도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재건축 아파트 조합원은 "솔직히 한편으로 내가 오랫동안 버텨서 싸우고 분담금 내고 일군 전재산인데, 분담금도 안 낸 사람들이 같이 살고 그 시설을 누리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형평성이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현행법을 살펴봐도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눈치보며 살게 만드는 조항이 보입니다. 똑같은 관리비를 내며 살더라도 임차인들은 경비원들을 얼마냐 두느냐 하는 것과 같은 아파트 관리의 문제에서 직접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런 결정권한은 입주자대표회의와 임대사업자(토지주택공사 등)에 있고, 임차인들은 임대사업자와 `협의`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법(공동주택관리법)이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를 고치기 위한 법안은 아직까지 국회에 잠들어 있습니다.

주거정책에 대한 비판은 정부 안에서도 나옵니다.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은 기자와 만나 "이 책임의 80%는 공공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승 위원장은 임대주택에 대한 차별 문제를 없애는 한 방안으로 `서른 평짜리 원룸`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임대주택을 공공부문에서 공급할 수 있고, 또 그런 생각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된 주거정책을 펴려면 먼저 어떤 사회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를 두고서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의 생활을 생각하고 집을 지어야 하는데, 일단 값싸게 가구 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다보니 지금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나라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임대주택에 대한 문제를 언론이 일회성으로만 다루고,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기도 한다는 쓴소리도 함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의 한 공공임대주택
■그래도 올해부터는…더는 `어디 사는지`로 차별하지 않았으면

임대주택이 어느 나라에서나 `못 사는 집`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공공주거정책이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집 열 채 가운데 여섯 채 이상이 임대주택입니다. 비엔나 시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주소를 통해 거주자의 사회적 신분을 알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곳이 처음부터 주거 분야의 모범사례였던 것 역시 아닙니다. 2018년 기준 인구 189만명의 비엔나는 100여년 전만 해도 살 집이 부족해 폭동이 일어나던 도시입니다. 50년 전 강남이 허허벌판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100년 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지어진 집들은 단순히 값싸게 공급된 건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명망 있는 건축가들의 손을 거쳐, 지금은 관광명소가 될 정도로 훌륭하게 지어졌습니다. 당대의 건축가였던 후베르트 게쓰너는 이런 건물을 지으면서 `가난한 자를 위한 건축은 절대 저렴해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 정신이, 지금의 비엔나를 만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게 먼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새해입니다. 새해를 맞아서는 결심도 많이 하게 되죠. 어떤 결심은 오래 지켜지기도, 많은 것을 바꿔내기도 합니다. 올해부터는 우리 안에서 `엘사`라는 말은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 이름으로만 기억하면 어떨까요. 내 아이의 친구가 `엘사`인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일보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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