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안철수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신인규 기자

입력 2021-03-23 07:45   수정 2021-03-23 08:33

서울시청 6층의 시장 집무실은 9개월 동안 잠겨 있다. 잠긴 문을 열게 될 새 시장은 보궐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이번 선거가 임기 1년짜리 보궐이 아니라 재선이 보장된 5년짜리로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서울시장 후보들이 내놓은 말들은 유난히 거대하면서도 희미한 구석이 있다.

선거공약은 유세장에 등장하는 립서비스와 구별되어야 한다. 정책의 목표는 물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과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언제까지 달성할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공약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선 안 될 각각의 인식표다.

이렇게 목표와 시점과 방법과 순위가 뚜렷이 공개된 계약서와도 같은 공약을 매니페스토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은 후보들이 내놓는 선거공약서에 매니페스토를 실천하도록 명시해두었다.

다른 주요 후보들과 달리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22일까지 매니페스토를 제출하지 않았다.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가 마감된 날까지 유권자들은 안 후보의 말들이 가진 목표와 시점과 방법과 순위를 확인하지 못한 채 무선전화에 응답해야 했다.

각 후보 캠프에 있어 매니페스토 실천 공약은 스무 쪽 남짓의 귀찮은 보고서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스무 장짜리 보고서 하나 제 때 못 그려내는 선거 캠프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정치인 안철수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빈약함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쏟아내는 논평보다 유권자의 알 권리에 참모진이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조용한 참사다.

다른 후보가 아주 낫다는 것은 아니다. 오세훈 후보가 내놓은 매니페스토 실천 방안엔 예산이 모두 빠져 있었다. 제대로 된 정책 설계가 있었다면 재원 마련 계획부터 가장 먼저 이뤄졌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업에서 재무 분석 없이 쓴 사업계획서는 반려가 된다.

박영선 후보가 제출한 10대 우선 공약에는 신규 정책이 하나도 없다. 새로운 단어로 쓰여 있지만, 예전에 누군가가 어디선가 해왔던 정책이라는 의미가 된다. 시민 관심이 집중된 부동산 분야에선 후보 간 정책 분별력도 높지 않다. 공약을 분석해온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차라리 이번엔 (시장을) 가위바위보로 뽑든지"라고 했다. 그 농담이 섬뜩하다.

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선심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 말 잔치가 아니라 공약을 연구하는 습관과 경험, 시스템이 우리 정치에 더욱 필요해 보인다. 메니페스토도 결국 그 연장선이다.

뜻과 방향이 옳다면 설령 좀 체계적이지 못하더라도 좋은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좋은 정책`들이 어떤 사달을 내는지 우리는 이미 겪은 바 있다.

2012년 18대 대선 후 당선인은 기존 공약에 없던 `문화융성`이라는 정책을 급작스럽게 추진했다. 국정 운영 주요 기조로 갑자기 떠오른 이 정책의 뒤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그 사람의 당시 이름은 최순실로, 현재 법정에서는 최서원 씨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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