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황제'로 이름을 떨친 원로 주먹 신상현(申常鉉)씨가 10일 오전 5시께 별세했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92세.
회고록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2013)에 따르면 고인은 1932년 서울 관수동에서 태어나 숭실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6·25 당시 대구 특무부대에서 1등 상사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신상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인은 1954년 대구에서 상경한 뒤 명동 중앙극장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우미관의 김두한, 명동의 이화룡, 종로파(나중엔 '동대문파'로 불림)의 이정재가 3각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고인은 독자 조직을 꾸려 명동연합과 느슨하게 결합했다.
고인은 1958년 9월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됐다. 그 후 1960년대 중반 조직을 재건해 1970년대까지 명동을 장악하며 신상사파 보스로 활동했다. 회칼을 휘두르는 조직폭력배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월간중앙 한기홍 기자가 대신 쓴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에 따르면 신상사는 "탁월한 발차기 실력, 번개 같은 선제공격, 단호하고 과감하게 상대의 눈을 순식간에 찌르며 급소를 가격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그의 밑에서 마산의 전설적인 주먹 구달웅, 서순종 전 세기프로모션 회장 등이 일했다.
일본 야쿠자 조직과 함께 관광호텔 카지노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마약과 사채, 유흥업소 관리에는 손을 대지 않아 1990년 노태우(1932∼2021)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어도 신상사의 명동 조직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머리말에 "저는 잘 모르는 분야는 쳐다보지 않았고, 범죄꾼과의 결탁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제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구설에 크게 오르지 않은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었다.
1975년 1월 신상사파가 범호남파 조양은 등에 습격당한 '사보이호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고인은 사건 이후 상대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합의서를 써줬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 12일 오후 1시30분, 장지 봉안당 홈.
(사진='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표지 재촬영)
한국경제TV 디지털뉴스부 박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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