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컨티넨탈 익스체인지(ICE) 편

▶ 한경 글로벌 마켓 영상으로 시청하기 : https://youtu.be/p9X6DNoFFDo
세계 최대 거래소인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면이 거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오프닝 벨’, ‘클로징 벨’ 타종 행사입니다. 미 경제방송 CNBC에서 매일 중개하는 방송 화면엔 주식 시장이 신고가를 쓰든, 예기치 않은 사태로 붉게 물든 날이든 매일 마감 시간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특별함을 기념하려 객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죠.
농구 코트를 7개쯤 넣을 수 있다는 뉴욕증권거래소의 객장엔 1903년 현재 위치에 건립 당시에 이미 첨단 가전인 에어컨, 기계식 주문 전달 시스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품인 둥그런 놋쇠 타종을 설치해 120여년 넘게 많은 월가 참가자, 투자자들에게 영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대형 타종이 이뤄지는 상장식 공간은 불과 20명 정도 밖에 올라서지 못할 만큼 좁고, 직접 들어보면 귓전을 때리는 종소리로 대화가 어려울 정도이지만 생경한 공간에서 다들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이 금융 시장까지 진입한 시대에 객장을 메운 파란색의 시타델 재킷을 입은 트레이더들의 존재는 오래된 종과 맞물려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S&P500 지수 등이 신고가를 쓸 때면 사진을 장식하는 '월스트리트의 아인슈타인' 피터 터크먼 씨와 같은 상징적인 증권 중개인들은 40년 이상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죠.
그런데 스마트폰 속 증권앱이나 개인용 컴퓨터로 거래하는 시대에 왜 아직도 이러한 사람들이 객장에 남아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1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초) 단위로 주문이 체결되는 알고리즘 거래에서 사람의 손길을 남겨둔 뉴욕증권거래소, NYSE는 어떻게 세계 금융 시장을 장악하고, 끊임없이 몸집을 불려나가는 걸까요?
전 세계에서 반짝이는 기업들을 들여다보는 바이 아메리카,오늘 이야기는 바로 NYSE를 삼킨 세계 최대 거래소 그룹, 인터컨티넨탈익스체인지(티커명 : ICE) 이야기입니다.

● 알고리즘의 최종 관문은 사람..NYSE를 지키는 소방수들
미국 나스닥을 시작으로 런던 증권거래소(LSEG), 일본거래소그룹(JPX), 한국거래소(KRX) 등 수많은 거래소가 완전한 전자 시스템으로 전환한 시대에, 자본시장을 태동시킨 원조 ‘NYSE’가 물리적 객장과 인간의 역할을 고집하는 것은 단순한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초기엔 브로커의 주문서를 담은 캡슐이 공기 압력으로 튜브를 타고 객장 내 거래 담당자에게 배달되는 기계식 시스템에서 점차 대량의 알고리즘을 동시체 처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은 꾸준히 발달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객장 내 트레이더는 주문을 낼 수도 있지만, 마치 교통 경찰 혹은 소방관처럼 최종적인 주문을 판단하고, 위기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함께 진화해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객장 속 주문 집행자, 즉 ‘지정 시장조성자(Designated Market Makers, DMMs)’로 흔히 마켓 메이커라고도 하죠. 단순히 주문을 체결하는 중개인을 넘어, 자신이 맡은 증권에 대해 공정하게, 그리고 시장 질서를 유지하도록 할 책임을 가진 하나의 ‘기관’입니다. 특히 시장이 급변하거나 거래 불균형이 심화될 때, 마켓메이커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본을 투입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변동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실제로 NYSE는 이들의 인간적 개입 덕분에 IPO 첫날 변동성이 경쟁 시장 대비 30%가량 낮다고도 하죠.
방문 당시 저희 취재팀에게 직접 다가와 NYSE 주문 집행이 과거 기계식(튜브를 통해 주문서를 전달하던 구조)에서 태블릿 알고리즘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알려준 피터 터크먼 NYSE 증권 중개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터크먼 씨는 “변동성이 클수록 인간의 의사결정이 더 중요해진다”면서 “알고리즘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좋을 뿐이고, 시장에 많은 오르내림이 있을 때 인간의 의사결정이 더 중요하며 제 생각에는 훨씬 더 관련성이 높아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꽤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진화해온 NYSE는 단순한 거래 공간을 넘어,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죠. 130년 가까운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와 1957년에 탄생한 S&P 500 지수 산출의 터전이 된 곳이자, GE(제너럴일렉트릭)나 월마트 같은 역사 깊은 기업부터 최근 상장한 레딧, 코어위브 등에 이르기까지 2,400개가 넘는 기업들이 모인 곳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자본시장의 틀은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당시 전쟁으로 각 주(州)가 떠안았던 막대한 부채를 연방정부가 인수하고, 약 8천억 달러에 달하는 정부 보증 부채, 즉 ‘국채'라는 시스템을 처음 고안해 냈습니다.
무디스를 비롯한 3대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에서 강등하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세상에 없던 이 발명품은 신생 국가 미국의 단단한 신용을 쌓고 훗날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차지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1792년 당시 뉴욕 맨해튼의 몇 안 되는 나무그늘, 버튼우드 나무에서 증권 중개인 24명이 이러한 채권을 0.25%의 수수료만 받고 거래하도록 합의한 뒤 세상에 없던 거래소까지 만들어졌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오늘날 미국 자본시장은 세계 2위로 부상한 중국 시장과 비교해도 네 배 이상,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30배 이상에 달하는 압도적인 위용을 갖추고 있죠.
● 월스트리트의 진짜 주인..기술+데이터 'ICE' 제국
그런데 이런 배경 속에 탄생한 뉴욕증권거래소, NYSE는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 철저히 민간에 의해 움직이는 기업입니다. 미국이라는 특수성에 더해 성장엔진을 달아준 모회사가 바로 ‘인터컨티넨탈익스체인지(ICE)’라는 거대한 금융 기술 제국입니다.
본래 에너지, 발전소 개발 업계에 몸담았던 제프리 스프레커 ICE 창업자 겸 회장은 선물로 거래하던 에너지 시장의 장외 거래가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을 간파한 그는, 90년대 후반 작은 거래소를 인수하며 ICE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기반의 투명한 거래 체계를 만들겠다던 스프레커 회장의 구상은 당시 2000년 대형 투자은행들과의 연합으로 현실화되었고, 미국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인터컨티넨탈익스체인지’를 공식 설립했습니다.
이후 2001년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 2007년 뉴욕상품거래소(NYBOT)를 차례로 흡수했고, 2013년 ‘NYSE 유로넥스트’를 인수하며 명실상부 핵심 자본시장의 돈줄을 쥔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월가의 지원을 받아 폭발적으로 성장한 ICE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전통적인 주식 거래 수수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를 통해 금융 인프라 자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크게 세 개의 사업들을 굴리는데, 하나 하나 알짜입니다. 우리가 아는 NYSE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거래소 사업이 있지만, ICE의 진짜 힘은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브렌트유 선물 등 에너지와 원자재 선물 시장을 장악하는 데서 나옵니다.
여기에 47조 달러가 넘는 채권 시장, 3백만 개가 넘는 증권의 가격 정보를 제공하는 방대한 채권과 데이터 서비스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나아가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기술 플랫폼까지 운영하며 금융 시장의 모세혈관처럼 수익을 확보한 기업이죠.
이러한 다각화된 포트폴리오 덕분에 ICE는 2024년 93억 달러에 달하는 연간 순매출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과 손잡고 디지털 자산 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두드리고 있기도 하죠.
● NYSE 혁신의 조력자이자 경쟁자…기술의 아이콘 '나스닥'
뉴욕증권거래소 NYSE가 전통과 혁신의 균형을 추구한다면, 그 경쟁자인 나스닥(Nasdaq)은 태생부터 완전한 디지털입니다. 세계 최초의 전자 주식 시장으로 출범한 나스닥은 물리적 객장 없이 더 낮은 비용과 빠른 속도를 무기로 기술 기업들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시대를 바꾼 기업들이 모두 나스닥을 통해 성장했죠.
나스닥 역시 단순 거래소에 머물지 않고, 아마존웹서비스(AWS)와의 파트너십으로 자체 인프라를 클라우드로 전환하고, 차세대 마켓플레이스 자회사인 이클립스(Eqlipse)를 앞세우는 등 스스로를 금융 기술 기업으로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 부작용 우려에도 진화하는 파생시장..시장 이끄는 비결은
이처럼 안정성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는 두 거인의 치열한 경쟁은 미국 자본시장을 상상 이상의 상품들이 탄생하는 혁신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한국 투자자들에게 익숙한 '3배 레버리지 ETF'와 같은 고위험·고수익 상품들입니다.
이러한 상품을 운용하는 대표적인 기업인 디렉시온(Direxion)은, 본래 고배율 레버리지 상품 운용사는 아니었습니다. 1997년 포토맥 펀드라는 이름의 우리가 흔히 아는 뮤추얼 펀드 운용사였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뒤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지수 3배 레버리지를 내놨고, 2010년대 이후 아이폰 등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2020년대 인공지능 기술로 가격이 크게 오른 SOXL(반도체 3배)로 큰 수익을 내왔습니다. 경쟁사인 프로셰어즈(ProShares)의 TQQQ(나스닥100 3배) 등도 시장의 방향성에 모든 것을 거는 투자자들을 위한 극한의 도구입니다.
최근엔 터틀 캐피탈, 렉스 셰어즈 등 신생 운용사가 서로 연합해 스트래티지(옛 마이크로스트래티지) 단일 종목의 상승 하락에 대한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를 비롯해 코인베이스, 트럼프미디어, 엔비디아 등 각종 인기 주식과 연계한 고배율 상품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물론 2018년 초 Cboe 변동성지수(VIX)가 하루에 115%씩 뛰어 역방향에 베팅한 자산이 녹아내린 ‘볼마겟돈(Volmagedon)’ 사태처럼 하루아침에 자산이 증발할 수 있는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지만, 미국 자본시장은 이러한 상품의 등장을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 증권거래위원회는 2020년 새로운 규정(Rule 6c-11)에서 고배율 상품에 대해 감독을 크게 강화하는 대신, 조건이 갖춰진다면 예외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시장의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시장을 흔히 ‘도박’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처참한 사례 중 하나인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여준 영화 <빅쇼트>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젠가 블록을 쌓아올려가며 멀쩡하던 초우량 신용등급의 상품도 시장 구조에 따라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죠
그런데 되짚어보면 미국 자본시장은 본래 탄생부터 완전히 새로운 제도에 기반한 뒤 생물처럼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하고,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 서킷브레이커를 도입하는 등 거대한 실패를 겪은 뒤에는 반드시 시스템 개혁으로 보완해왔습니다.
실패를 용인하되, 그로부터 배우고 더 단단한 시장을 만들어나가는 문화. 이것이 바로 창업과 도전에 대한 미국 시장의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달러화, 압도적인 기술기업 등 세계 어느 곳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시장에 위협이 될 때 강력한 처벌을 내리면서 동시에 도전을 허용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한국 투자자들이 국내 시장을 이탈해 더 높은 수익의 미국의 혁신 기업, 혁신 상품을 택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더 나은 기업, 상품들에 기회를 주는 자본 시장의 문화가 아닐까요.

(뉴욕 = 김종학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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