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의 7대 리스크 요인을 지적하면서, 은행 컨소시엄 중심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야 한다고 재차 주장했다.
한은은 27일 '스테이블코인의 주요 이슈와 대응 방안' 보고서를 발간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한국 경제의 새 가능성을 여는 열쇠일 수 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불안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며 "혁신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신뢰가 중요한 만큼 제도적 안전판이 긴요하다"고 밝혔다.
이병목 한은 금융결제국장은 "한은이 그간 스테이블코인 이슈에 대응해 온 내용과 함께 주요 이슈에 대한 조사 연구 내용 등을 집대성한 종합 보고서를 발간하게 됐다"며 "이번 보고서를 한은 스테이블코인 백서로 이해하시고 봐달라"고 발간 취지를 설명했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의 잠재 불안요소로 ▲디페깅(스테이블코인의 가치가 연동 자산의 가치와 괴리되는 현상) 위험 ▲코인런(코인 투자자의 대규모 현금상환 요구) 등 금융안정 위협 ▲소비자 보호 공백 ▲외환·자본 규제 우회 위험 ▲통화정책 효과 약화 ▲금융중개 기능 약화 등 7가지를 꼽았다.
한은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이름 그대로 법정통화와 '1대 1 가치 유지(페깅)'를 약속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2023년 초 써클이 발행하는 USDC는 실리콘밸리은행 파산(SVB사태) 영향으로 한 때 0.88달러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다.
제2 기축통화인 유로화에 기반해 발행된 EURC의 경우, 1대 1 연동 비율이 깨지는 빈도는 더욱 잦고, 이탈 폭은 더욱 크다.
박준홍 한은 결제정책팀장은 "대표적인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테더와 USDC마저 1코인은 1달러라는 기본적인 약속이 사실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된 직후에 유통 물량을 풍부하게, 혹은 안전하게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가치가 매우 불안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현금으로 바꾸는 요청이 밀려들어 올 경우, 코인런이 발생할 수 있단 문제도 지적됐다. 국채 등 스테이블코인의 준비 자산 가격이 크게 떨어지거나, 발행사 또는 정보기술(IT) 장애가 발생할 경우 투자자들의 코인 상환 요구가 몰릴 수 있다는 경고다.
특히 디지털을 매개로 하는 스테이블코인의 특성상 코인런의 속도는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사태)에 비해 훨씬 규모는 크고 빠를 것으로 한은은 전망했다. 대표적인 예로 SVB사태 때 써클이 스테이블코인 발행 대금으로 SVB에 예치한 자금은 전체 준비자산의 8%에 불과했지만, 써클이 보유한 준비자산의 신뢰도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시가총액의 18%에 이르는 78억 달러의 상환 요구가 몰리기도 했다.
아울러 민간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기업 간의 사적 계약이다. 1코인=1원이라는 약속은 발행자와 이용자 간 약속이며 여기에서 국가가 가치를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발행사가 코인 인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소비자는 보호받을 수도 없다.
또,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을 IT기업이나 대기업이 발행할 수 있도록 하면, 금산분리 원칙과의 충돌소지가 있다고 봤다.
박 팀장은 "대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게 되면 사실 화폐를 발행하면서 지급 결제업을 허용하게 되는, 이른바 '내로우 뱅킹'을 가질 수 있다"며 "특히 대기업들이 강력한 플랫폼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내다봤다.
아울러 스테이블코인이 외환·자본 규제를 우회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예를 들어, 국내 투자자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익명 거래가 가능한 개인 지갑으로 옮긴 뒤 달러 스테이블코인 등 다른 자산으로 바꿔 해외로 옮겨도 현재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 확산시,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효과를 제약할 가능성도 커진다고도 우려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에서 발행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무관하게 발행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은 분석 결과, 은행 예금 내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의 도매 예금 비중을 10%로 가정할 경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100조 원 발행되면 통화량은 93조 3천억 원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또,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매수·매도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위험도 존재한다. 박 팀장은 "투자자들의 스테이블코인 상환 요구가 몰릴 경우, 국채 매도를 대량으로 긴급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BIS 조사에 따르면. 국채 매도 시 단기 금리가 영향 받는 정도가 더 크다"고 짚었다.
끝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확대되면, 은행의 예금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은행의 자급공급 기능이 크게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은 "은행 예금 기반이 줄어들고, 대출 여력이 줄어들면 은행의 조달 금리가 올라가고, 결국 대출 금리가 올라갈 수 있다"며 "이는 가계, 기업, 혹은 취약계층의 대출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한은이 내놓은 해법은 은행 중심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이다.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주체가 되거나, 은행권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문제의 상당 부분이 현행 규제 체계에서 관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은은 "IT기업 등 비은행기업은 은행 중심 컨소시엄에 함께 참여해 혁신과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비은행기업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야 혁신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과도하다"며 "은행 중심의 발행 방식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스테이블코인 제도가 안정적으로 도입될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또, 통화·외환·금융당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정책협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책협의기구에서 스테이블코인 발행 인가와 준비자산 운용, 이자 지급 금지 등 핵심 사안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예금토큰 상용화와 병행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예금 토큰은 은행 예금을 토큰 형태의 디지털 자산으로 변환한 것으로, 한은이 운영하는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한다. 소비자들은 물품이나 서비스 구매 등에 이 예금 토큰을 사용할 수 있다.
한은은 "은행이 주도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하고, 예금토큰과 상호 보완적으로 설계된다면 민간의 혁신과 공공의 신뢰가 조화되는 이중 구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울러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은행권, 조선 후기 당백전처럼 신뢰를 얻지 못한 화폐는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맞았다"며 "혁신에만 집착해 반드시 갖춰야 할 안전장치를 도외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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