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귀화 성씨의 어제와 오늘

입력 2017-01-17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귀화 성씨의 어제와 오늘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7천 명 안팎의 새로운 성씨가 생겨난다고 한다. 귀화한 외국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이름을 바꾸는 김에 아예 성과 본을 새로 짓는 '창성창본'(創姓創本)을 택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1월부터 11월까지 5천991명이 창성창본 허가를 얻어 새로운 성씨의 시조가 됐다.


김·이·박·최·정 등 한국인이 많이 쓰는 성씨를 따라 쓰고 거주지를 본관으로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마도 윤 씨, 몽골 김 씨, 태국 태 씨처럼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레·팜·에·짱·떵 등 본명의 한 글자를 따 성으로 짓는 사례도 있고, 코이·하질린·스룬·무크라니·즈엉 등 외국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서촌(西村)·석원(石原)·신곡(新谷)처럼 일본식 성을 우리 발음대로 신고하기도 한다.


유명인 중에서는 독일 이씨의 시조인 이참(베른하르트 크반트)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영도 하씨를 만든 방송인 하일(로버트 할리) 씨, 축구선수 출신인 구리 신씨 신의손(발레리 사리체프)과 성남 이씨 이성남(라티노프 데니스) 씨 등이 창성창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전체 성씨는 5천582개로, 2000년 728개에서 7.7배나 늘어났다. 이 가운데 4천75개가 한자가 없는 성씨인데, 귀화 외국인이 등록한 희성이 대부분이라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다. 이 숫자는 음이 같은 성씨를 하나로 간주한 것이어서 본관까지 따지면 10배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성이 늘어나는 것은 2000년대 이후 귀화자가 부쩍 늘어나고 2008년 호주제 폐지 후 법원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창성창본을 허가해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전에도 귀화 성씨가 적지 않았다. 조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씨 277개 가운데 절반가량인 130여 개가 귀화 성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귀화 성씨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와 사기에는 중국 은나라가 멸망할 때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다.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기자의 후손인 마한 원왕의 세 아들 우성·우량·우평이 각각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가 됐다고 한다.



서기 42년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배필로 맞는다. 학자들은 인도 북쪽의 아요디아국이 아유타국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부부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아들이 어머니 성을 따라 김해 허씨가 됐다. 그래서 김수로의 후손인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성이 달라도 혼인을 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신라의 4대왕 석탈해 탄생 설화도 그가 귀화인임을 암시한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용성국에서 건너온 배의 알에서 깨어났다고 기록돼 있는데, 사가들은 용성국을 일본 원주민 아이누족의 부족국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월성 석씨는 석탈해를 시조로 한다.



베트남에서 이주한 왕족도 있다. 13세기 리 왕조의 마지막 왕자 리롱뜨엉은 왕조 교체기에 고려로 망명했다. 그가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공로를 세우자 고종은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지역인 화산 땅을 식읍으로 내려주고 화산군으로 봉했다. 그는 이름을 이용상으로 바꾸고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리 왕조의 태조가 즉위한 음력 3월 15일에 해마다 베트남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다.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위구르계 장순룡은 덕수 장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온 설본(경주 설씨)과 이현(임천 이씨)도 위구르계다. 조선시대 많은 명신을 배출한 거창 신씨도 고려 문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의 후손이다.





여진족 퉁두란은 고려에 귀화해 이씨 성을 하사받아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됐다. 이름을 이지란으로 바꾼 그는 이성계가 왜구들과 벌인 전투에서 숱한 전공을 세우는가 하면 위화도 회군 때도 일등공신으로 뽑혀 조선 건국에 한몫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의 선봉장으로 참전한 사야가는 부산포에 상륙하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한다. 평소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조선을 흠모했고, 임진왜란을 명분 없는 침략전쟁으로 본 데 따른 결단이었다. 그가 조선에 조총과 화포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고 의병의 일원으로 왜군을 무찌르자 조정은 종2품의 벼슬을 내리고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한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그의 후손들이 우록 김씨다. 이들은 김해 김씨라고도 하는데, 김수로를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와 구별해 나라에서 성을 하사했다는 뜻으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에 아들과 함께 참전해 전사한 명나라 장수 가유약은 소주 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효종)은 명나라 사람 9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장차 청나라에 복수할 때 길잡이로 쓸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효종과 함께 북벌 계획을 짜다가 효종이 승하하자 명조 복원과 귀향의 꿈을 접고 조선에 눌러앉는다. 임구 풍씨의 시조 풍삼사, 통주 양씨 시조 양복길, 항주 황씨 황공, 낭야 정씨 정선갑, 제남 왕씨 왕이문 등을 일컬어 9의사라고 한다. 1627년 조선 땅에 표착했다가 정착한 박연(벨테브레)의 원산 박씨, 그보다 26년 늦게 발을 디딘 하멜 일행 중 한 명이 시조인 것으로 알려진 병영 남씨는 네덜란드계 귀화 성씨다.



귀화 성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은 근래 들어 주목받는 현상이지만 이처럼 우리 역사를 더듬어보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역사 속 귀화인들의 출신 지역도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뿐 아니라 인도, 위구르, 베트남, 네덜란드 등 다양하다. 우리나라가 오래전부터 글로벌 국가이자 다문화 사회였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성싶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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