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경성방송국 90주년과 세계 라디오의 날

입력 2017-02-14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경성방송국 90주년과 세계 라디오의 날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라디오에서는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라고 시작하는 일본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첫 방송 전파가 쏘아 올려진 것이다. 1906년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탄생한 지 21년, 세계 최초의 정시 라디오 방송국 미국의 KDKA가 출범한 지 7년, 일본 도쿄에서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JODK'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일본에 할당한 호출부호(콜사인) 'JO'에 도쿄(AK)·오사카(BK)·나고야(CK)에 이은 4번째 방송국이라는 뜻의 'DK'를 합친 것이었다. 주파수는 중파 690㎑, 출력은 1㎾였다.



경성방송국은 1926년 12월 서울 중구 정동 1번지,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2층 사옥을 준공한 뒤 이듬해 1월부터 시험방송에 나섰다. 초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7대 3의 비율로 방송하다가 조선인의 불만이 커지자 1927년 7월부터 일본어와 조선어의 비율을 6대 4로 조정했고, 1933년 4월 연희방송소가 문 연 뒤로는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조선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나눠 운영했다.




경성방송국 설립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했고 이사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와 기술진도 일본인이 맡았으나 개국 요원 가운데는 두 쌍의 조선인 부부도 있었다. 첫날 일본인과 나란히 앉아 우리말로 개국 소식을 전한 이옥경은 1926년 7월부터 체신국 무선방송소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27년 1월 특별채용돼 역사적인 첫 방송의 주인공이 됐다. 남편 노창성도 경성방송국 기술부 직원이었는데,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다.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시험방송 때부터 연출과 제작을 맡아 '국내 프로듀서 1호'로 기록됐고, 아내 마현경은 '경성방송국 공채 1호 아나운서'로 한국 방송사에 이름이 올라 있다.



라디오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정작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쌀 한 가마니 값이 5원일 때 월 청취료가 2원이고 온 가족이 들을 수 있는 수신기 가격은 100원이었으니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려면 경성방송국과 계약을 맺어야 했고 수신 계약자는 청취허가장을 대문 밖에 붙여야 했다. 개국 당시 청취자는 조선인 275명을 포함해 1천4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인기가 급등해 조선어 전용 방송이 생겨난 1933년에는 2만5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당국이 불법 청취자 단속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5년부터는 지방에도 방송국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KBS는 라디오 방송 90주년을 맞아 13∼24일 서울 여의도 본관 2층 시청자광장에서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16일에는 지난 8일 KBS홀에서 펼친 '라디오 90년, 미래 100년-KBS 라디오 빅 콘서트' 실황을 KBS 라디오 3개 채널을 통해 녹화 중계할 예정이다.




90년 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에 이어 세계 6번째로 정규 방송을 시작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국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로 이뤄진 것이어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어렵다. 방송 내용도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관리와 상공인들을 위한 관급 보도나 경제 시황 등이 주를 이루다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노골적인 선전 선동으로 채워졌다. 이에 앞서 1924년 12월 1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우미관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하고 무선전화 방송이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시험방송을 송출한 조선일보 등이 방송국 설립 허가를 신청했으나 일제는 한국인에게 방송을 끝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해방 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우리나라 방송이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은 1947년 9월 3일이었다. ITU가 미국 애틀랜타에서 회의를 열어 한국에 'HL'이라는 고유의 호출부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첫 방송은 10월 2일에 이뤄졌기 때문에 1964년 방송의날 제정 당시 10월 2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방송 주권을 찾은 날은 9월 3일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1978년부터는 방송의날을 이날로 옮기고 방송의날 기념식과 한국방송대상 시상식 등의 행사를 펼치고 있다.


라디오는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1970년대 이전까지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전국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TV가 위세를 떨친 뒤로도 라디오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가장 편안한 친구로 남아 있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구촌 구석구석을 그물망처럼 엮어놓은 요즘에도 여전히 인류가 가장 폭넓게 이용하는 미디어로 자리 잡고 있다. ITU에 따르면 전 세계 가정의 75%가 라디오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값싼 수신기로, 인공위성의 도움 없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손쉽게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분쟁이나 재해가 발생한 지역에서는 라디오가 생명줄 구실을 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팟캐스트, 보이는 라디오, 라디오 애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1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라디오의 날'(World Radio Day)이다. 라디오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방송제작자 간의 네트워크와 국제협력을 증진하자는 취지에서 2011년 총회에서 결정해 2012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1946년 유엔이 '유엔라디오'를 설립한 날이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라디오가 교육, 지역문화, 언어를 보호하는 핵심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에 대해 청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경성방송국 개국 90주년과 세계 라디오의 날을 맞아 라디오와 함께해온 추억을 떠올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미래를 그려본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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