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하고 긁어내는 '수행'의 흔적들…오세열 회고전

입력 2017-02-17 15:17  

덧칠하고 긁어내는 '수행'의 흔적들…오세열 회고전

22일부터 학고재갤러리서 '암시적 기호학'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어린애들이 그렇게 그리잖아요. 제 마음이니 왜 그렇게 그렸느냐고 묻지 마세요. 하하하."

17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반백의 화가 오세열(72)이 끊임없는 질문에 가볍게 타박했다.

이곳에서는 22일부터 작가의 예술 인생 40여 년을 돌아보는 회고전 '오세열: 암시적 기호학'이 열린다.

전시장에 걸린 회화 50여 점은 심오한 전시 제목과 딴판이다. 전시장 입구의 대작은 검은 바탕에 숫자 '1·2·3·4·5·6·7·8·9·10'과 새, 비행기 등이 어지러이 놓인 모습이 학창시절 낙서로 가득 찼던 검은 칠판을 연상케 한다.

다른 작품들도 전혀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장벽이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여성 작가에게서 느낄법한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풍기는 회화도 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작가에게서도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작가는 "그림은 즐거움이자 유희가 돼야 한다"면서 "사명감이나 책임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때 그리고 싶은 대로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쉽게 완성한 작품들은 아니다.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흰 분필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섬세하게 긁어낸 것임을 알게 된다. 작가는 광목천 위에다 기름기를 최대한 덜어낸 다양한 색의 유화물감을 계속 덧칠한 뒤, 나이프나 면도날, 이쑤시개 등으로 물감층을 긁어내는 일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한다. 조수를 두지 않는 70대 작가에게는 고된 일이다.

캔버스를 몸처럼 생각한다는 작가는 물감을 덧칠하고 다시 긁어내는 작업을 수행처럼 느낀다고 설명했다. "물감을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하면 가장 밑바닥에 깔린 색들도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제 솔직한 내면과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오세열은 해방둥이다. 어릴 적 집 도배를 새로 할 때마다 벽면에 그림을 그려 혼난 기억도 많다. 이번 회고전에는 작가가 서라벌예대 회화과 재학시절 그린 구상 작품도 포함됐다. 우정우 학고재갤러리 실장은 "미술관 전시를 포함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전체적으로 다룬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국내 개인전은 2008년 청담동 샘터화랑 이후 9년 만이다.

오세열은 최근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등 외국 주요 도시에서 연 개인전과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단색 바탕의 작품 때문에 그를 '포스트 단색화가'로 분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오세열은 "제 그림은 단색화가 아니고, 제 입에서 '단색화'라는 말을 꺼내본 적도 없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거나,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작품에 어떤 제목도 붙이지 않은 것도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그림에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 데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다.

"어릴 적 우리가 몽당연필에 침을 살살 묻혀서 1 2 3 4 5 이렇게 쓰잖아요. 그 생각이 났어요. 또 생각해 보면 숫자는 인간의 운명 아닙니까. 숫자 때문에 죽고 사는 사람도 많죠. 숫자가 싫다고 버릴 수도 없고요."

작가의 외종조부, 즉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는 소설가 월탄 박종화(1901~1981)다. 어린 시절 박종화를 두 차례 만났다는 작가는 "왜 글을 쓰지, 그림을 쓰느냐"는 어른의 꾸지람에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뒷이야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전시는 3월 26일까지. 문의는 ☎ 02-720-1524.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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