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생각이 실종된 어느날' '몽유병자들' '산책자'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코이너 씨는 작별을, 인사를, 기념일을, 축제를, 작업의 마감을, 새로운 인생 단계의 시작을, 결산을, 복수를, 확정 판결을 싫어한다." ('코이너 씨가 싫어하는 것')
20세기 세계문학을 수놓은 작가들의 작품집이 나란히 나왔다.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이후)은 독일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산문집이다. 'K씨' 또는 '코이너 씨'를 주인공으로 브레히트가 30여 년에 걸쳐 남긴 글들을 모았다.
K씨는 희망을 '생각의 아버지'라 여긴다는 비판에 이렇게 대답한다. "희망이 아버지가 아닌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게 어떤 희망인지 하는 논란은 벌어질 수 있다. 친부 확인이 어렵다고 해서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고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의 아버지')
한두 문장, 길어야 한 쪽짜리 산문들은 서민적이고 반영웅적이며 질서에 굴종하지 않는 한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나치와 자본주의에 문학으로 맞선 브레히트의 자화상으로도 읽힌다. 김희상 옮김. 140쪽. 1만2천원.
시집 '예언자'로 잘 알려진 레바논 출신 작가 칼릴 지브란(1883∼1931)은 잠언 성격의 산문시 말고도 인간 본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우화를 즐겨 썼다. '몽유병자들'(이상북스)은 작가가 남긴 세 권의 우화집을 묶은 책이다.
한 마리 여우가 해가 떠오를 무렵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말했다. "오늘 점심은 낙타로 해야지." 여우는 오전 내내 낙타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정오가 되었을 때 여우는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말했다. "쥐라도 좋지 않겠어?" ('여우')
표제작 '몽유병자들'은 잠을 자면서 거리를 방황하는 모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위선을 꼬집는다. 한밤중 집 정원에서 딸과 마주친 어머니는 "내 청춘을 짓밟고 내 허물어진 육체 위에 너의 생명을 꽃피웠다"며 딸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딸 역시 "내 인생을 별 볼일 없는 네 인생의 복제판으로 만들었잖아"라며 맞선다. 수탉의 울음과 동시에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진다. 양억관 옮김. 235쪽. 1만3천500원.
스위스 출신 작가 로베르트 발저(1878∼1956)는 20세기 독일어권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히지만 생애는 비극적이었다. 독일 지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고 27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다. 1956년 크리스마스에 산책하던 중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 생활을 접고 스위스로 돌아간 발저는 짧은 산문을 신문에 투고하며 생활했다. "만약 누군가가 산문을 쓰고 싶다면서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그가 품고 있는 계획 그 자체가 불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최후의 산문')라는 작가의 말에는 유머와 좌절감이 섞여있다.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산책자'(한겨레출판)는 발저의 글 42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맨 마지막에 실린 '산책'을 제외하면 10쪽이 채 안 되는 스케치나 우화다. 무기력한 보통 사람이 등장해 고립됐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세계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깨어있는 시간엔 오로지 산책과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작가는 1919년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앞날을 내다보듯 이렇게 썼다.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400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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