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역사 2cm] '무소불위' 경찰, 현직 검사를 빨갱이로 몰아 총살했다

입력 2017-06-05 11:09  

[숨은 역사 2cm] '무소불위' 경찰, 현직 검사를 빨갱이로 몰아 총살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인권 친화적인 경찰'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가 탄력을 받았다.

박범계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정치·행정분과 위원장도 검·경 수사권 조정 가능성에 힘을 보탰다.

다만, 조국 수석과 박 위원장은 경찰의 인권의식을 개혁하지 않으면 검찰 수사권을 경찰에 넘길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검찰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수사권을 조정하되 경찰 조직 또한 개혁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경찰이 그동안 수사는 물론, 집회·시위 대응 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환골탈태 없이 더 큰 권한을 가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보·대테러·외사·경비·경호 등 기존 권한에 수사권까지 더하면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어서 국민 기본권을 침해할 위험이 더 커진다.

1986년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의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다.

경찰은 박씨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물고문으로 숨지게 한 것도 모자라 경찰 총수까지 합세해 사건을 은폐했다.

경찰은 사망 당일 밤 검찰을 찾아가 "턱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날조 보고서를 보여주며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유족을 설득해서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면 사건을 조용히 끝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다.

고문 가능성을 직감한 검찰의 제동으로 부검이 이뤄져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만, 경찰이 독자 수사권을 가졌다면 고문치사는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경찰 권력이 무소불위였다.

무고한 현직 검사를 총살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1948년 경찰 총에 맞아 숨진 검사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차석(당시 38세)이었다.






여수·순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한 혐의로 박 검사는 즉결처형을 당했다.

여순사건은 군에 침투한 공산당원들이 1948년 제주 4.3사건 진압에 반대해 일으킨 폭동이다.

폭동은 8일 만에 진압됐으나 반란군이 여수와 순천 등지를 돌며 총기를 난사하고 진압군 또한 강경하게 대응한 탓에 7천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란군 총격과 공개 처형, 교전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경찰의 즉결처형 등으로 숨진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반란군에 협조한 민간인을 찾는 과정이 마구잡이여서 억울한 사망자도 적잖았다.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에 진주했을 때 폭동 주력 부대는 이미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도주한 뒤였다.

대오에서 이탈한 소수 반란군과 민간 좌익 활동가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물론, 단순 동조자들도 처형됐다.

부역자 심사는 매우 허술했다.






집이나 산에 숨은 모든 주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아놓고 부역 여부를 가렸다. 그 작업은 폭동사태 당시 살아남은 경찰과 우익인사, 우파단체 청년 등이 맡았다.

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여지없이 부역자가 된다. 증거나 증언은 필요 없었고, 본인 해명은 통하지 않았다. 반항이라도 하면 기관총 세례를 당했다.

단 한 번의 손가락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서 손가락총이라고 했다.

손가락총에 걸려들면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처형장으로 끌려가 개머리판이나 참나무 몽둥이, 체인 등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일본도를 휘둘러 목을 치기도 했다.

심사관에게 평소 밉보여 즉결처형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손목에서 화약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이 처형되기도 했다.

박찬길 검사도 누명을 쓰고 숨졌다.

황해도 출신의 박 검사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회 장학금을 받아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부인, 자식 3남매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법관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경찰은 해방 직후부터 박 검사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 기회를 엿봤다.

경찰이 체포해 넘긴 좌익 혐의자를 증거 부족 등 이유로 무혐의 처리하거나 선처했기 때문이다.

무고한 민간인을 사살한 경찰관을 박 검사가 기소했을 때는 경찰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기소된 경찰관은 산으로 도주하는 남자를 보고 좌익 활동가로 판단하고서 뒤따라가 총을 발사해 다리를 맞혔고, 쓰러진 뒤에는 한 방 더 쏘아 죽였다.

이 남자는 산에서 무허가로 땔감을 한 사실이 들켜 처벌받을까 두려워 도망갔을 뿐 반체제 활동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다.

박 검사는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점에서 경찰관의 죄질이 나쁘다고 보고 징역 10년 형을 구형했다.

이에 경찰은 박 검사를 '적구검사'로 상부에 보고했다. 공산당 앞잡이를 뜻하는 '붉은 개'라는 것이다.

박 검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경찰은 여순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응징에 들어간다.

반란군에 가담해 인민재판소 판사로 일한 것으로 조작해 총살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경찰이 순천을 탈환한 후 박찬길 인민재판장을 비롯한 좌익 폭도 21명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총살했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동료 검사가 즉결처분됐는데도 의외로 조용했다.

'적구검사' 불똥이 검찰 내부로 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묻힐 뻔했으나 뒤늦게 실체가 드러난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유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책임자 처벌과 진상조사를 법무부에 탄원한 덕분이다.

약 2주일간 조사한 군·경·검 합동수사본부는 최천 전남경찰청 차장(총경)이 허위 사실을 토대로 총살을 지시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최 총경을 처벌하면 여순사건으로 숨진 경찰을 모욕하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내무부는 최 총경을 처벌하지 않은 채 경북경찰청 경무과장으로 전보 조처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봉합한다.

국회의원과 학교 교장도 억울하게 희생됐다.

경찰은 당시 순천 갑구 국회의원 황두연을 연행해 이적행위 정황이 있다며 고문했다.

국회의원을 '빨갱이'로 모는 데는 당시 극우신문 평화일보가 앞장섰다.

평화일보는 '순천반란지구 인민재판에 국회의원 황두연 배석판사로 활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 시민의 일방적인 주장만 믿고 현장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오보였다.

'여수반란의 총지휘자는 여수여중 송욱 교장'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송 교장은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던 우익인사였다.

그런 송 교장을 반란군 수괴로 지목해 총살했다. 수많은 사람이 탄원서를 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박 검사의 억울함은 기세훈 검사의 조사에서 더 자세히 밝혀졌다.

최 총경이 순천경찰서 정보과 형사 2명의 보고서만 믿고 박 검사 처형을 속전속결식으로 결정한 사실이 드러난다.

계엄사령관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고 당시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의 만류에도 총살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일제 경찰이 당시 간부의 82%를 차지할 정도로 친일 색채가 짙은 경찰은 군과 검찰을 무시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검찰이 사건을 조작한 정보과 형사 등 4명을 체포하자 경찰은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총기와 각종 장비를 전남경찰청 뒷마당에 버려놓고 훈련과 직무를 거부했다.

사회 곳곳에 침투한 공산당 세력을 척결하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항의 시위다.

검찰과 경찰이 날 선 대립을 하자 이범석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이 중재에 나서 경찰관 4명을 체포 하루 만에 석방한다.

최 총경 처벌도 무산된다.

여순사건 진압 때 수많은 경찰이 목숨을 잃었는데 검사 한 명 죽은 것이 뭐가 대수냐는 항의 때문이다.

국회도 경찰을 지원했다.

동료나 친척을 잃고 흥분한 상태에서 옥석을 가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최 총경 처벌을 반대한다는 논리를 폈다.

시국 수습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최 총경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언어도단이며 대한민국 안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는 비난도 곁들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경찰 사기 저하를 문제 삼아 사건을 불문에 부치도록 지시했다.

결국, 박 검사의 억울한 죽음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진실규명도 흐지부지됐다.






경찰은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경찰위원회에 인사권과 감사권을 부여해 조직을 감시·견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집회·시위 현장에 물대포와 차벽을 원칙적으로 배제한다는 약속도 했다.

이 정도로는 11만여 명을 거느린 경찰 조직의 권한 남용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수술을 앞둔 검찰의 견제마저 크게 약해지는 마당에 획기적인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대형 트럭이 강한 제동력을 갖지 못하면 도로 위 흉기가 되는 것처럼 경찰 권력에 상응하는 견제력이 작동하지 않으면 민중의 지팡이는 언제든지 몽둥이로 돌변할 수 있다.

had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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