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열이 목숨, 무엇으로 보상하나요"…추모객의 독백

입력 2017-06-08 13:56   수정 2017-06-08 14:35

"한열이 목숨, 무엇으로 보상하나요"…추모객의 독백

"30년 흐른 지금까지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를 요구할 줄 몰랐다"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우리 한열이의 목숨은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나요?"

8일 광주 망월묘지공원 민족민주 열사묘역에 마련된 이한열 열사 묘소를 찾은 백신종(65)씨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6·10 민주항쟁 30주년 의미를 되새기며 혼잣말을 했다.


백씨는 이 열사 부친과 맺은 인연으로 해마다 6월이 다가오면 경남 거창에서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까지 추모 발길을 이어왔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라는 국민 열망은 달성했지만, 사회 변혁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며 지난 세월을 탄식했다.

백씨는 "한열이는 목숨을 내던진 게 아니라 군부독재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며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 국가다운 국가'를 요구하고 있을 줄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는 언제나 승자가 지배해왔다"며 "시대 고비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왔지만, 사람들은 숭고한 희생을 쉽게 잊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항쟁을 촉발한 이 열사의 희생이 사회적으로는 커다란 의미를 남겼지만, 당사자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백씨는 "한열이가 죽었던 80년대는 '아프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시절"이라며 "아무도 몰래 광주까지 와서 장례를 지켜보느라 가족들은 내가 실종된 줄 알고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또 "한열이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6월마다 경기를 일으켰다"며 "3년쯤 지나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5∼6년쯤 됐을 때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상처를 끄집어냈다.


백씨는 30년 전 항쟁 중심에 섰던 이 열사 나이가 된 청년 세대에게 전하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청년과 학생들의 판단이 옳은 곳에 서 있지 않으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 열사를 한동안 말없이 쳐다봤다.

이 열사는 1987년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이를 지켜본 시민이 분노했고 '넥타이 부대'가 조직돼 회사원까지 도로로 나서는 등 6월 민주항쟁이 전국민적 민주화운동으로 번진 도화선이 됐다. 이 열사는 26일 뒤인 7월 5일 숨졌다.

h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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