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서 일하다 항쟁소식지 제작 남기수씨의 1987년

입력 2017-06-09 14:00  

서점서 일하다 항쟁소식지 제작 남기수씨의 1987년

국민운동부산본부 '민주부산' 발행 참여…"이름 없는 이들의 피땀어린 산물"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박두식씨, 카운터 전화 왔습니다."

1987년 6월 어느 날 저녁, 부산 서면 천우장 뒤 다방에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박두식은 나의 가명.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시간이나 장소 약속은 '칼' 같이 지켜야 했다.

소위 '보안' 때문에 전화 용건도 간략해야 하며 특히 이름을 밝히거나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다방에서 나와 2차 접선 장소로 이동했다.

한 목사님 댁 조그만 방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일행과 도착한 곳은 해운대의 한 이층집. 그곳에서 나는 배낭 속에 든 전동 타자기와 자, 딱풀, 화공대지, 유산지 등 인쇄물 제작에 필요한 편집 도구를 꺼냈다.

작업에 동참한 이들과 며칠간의 밤샘 작업 끝에 '민주부산' 1호가 탄생했다.


민주부산 편집자로 참여했던 남기수(58)씨, 현재 출판사 '도깨비' 대표가 회고한 1987년 6월의 기억이다.

'민주부산'은 당시 부산 6월 항쟁 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부산본부(국본)의 소식지였다.

6월 항쟁이 시작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세력 연대단체였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는 국본으로 외연을 확대하면서 소식지 '민주시민'도 '민주부산'으로 바꿨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한 남 대표는 당시 경성대 앞 '산수글방'이라는 사회과학 서점에서 신간을 소개하는 도서 안내지를 만들었다.

직접 글씨를 쓰고 삽화도 넣고 편집까지 해서 만든 3단짜리 리플릿 도서 안내지는 대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86년 겨울 진성일 열사 분신을 계기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는 남 대표를 홍보팀으로 '스카우트'했고 본격적으로 투쟁 소식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 대표는 "사방에 '눈'이 있던 1980년대에 '민주시민', '민주부산'을 만드는 일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며 "이름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사진, 원고수집, 활자, 편집, 인쇄, 배포 등 많은 분의 땀과 눈물이 소식지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남 대표는 지금은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을 당시에는 100% 수제작업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남 대표가 밝힌 소식지 제작과정의 일부다.

먼저 파란색으로 가로, 세로 선이 그어진 '화공대지' 위에 타자기로 친 원고를 칼로 반듯하게 오려 딱풀로 붙인다.

화공작업이라 불리는 이 과정에서 핀셋으로 원고를 하나하나 붙이고 필요한 선을 긋고 나서 편집용지 좌우페이지에 자를 댔을 때 문장 행 높이가 딱 맞아야 한다.

특히 제목은 사진 식자를 따로 붙여야 했는데 '군부독재타도'라는 단어를 짜 맞추기 위해서는 군고구마, 부산, 독도 등 상관없는 단어를 돈을 주고 사 와서 한 글자씩 잘라 만드는 식이었다.


편집이 끝나면 한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갱지'라고 불리는 우중충한 색깔의 용지에 빽빽하게 기사가 적힌 소식지 다발이 만들어졌다고 남 대표는 설명했다.

남 대표는 "출판사 작업실을 전전하며 소식지를 만들다가 1987년 초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이후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권유로 중구 동광동 인쇄 골목 근처에 '낚시 정보'라는 위장 사무실을 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주부산'은 항쟁이 격화되면서 발행 시기를 주간에서 매일로 바꿔 일간지 수준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당시 '민주부산' 팀에는 기자팀, 제작팀으로 나눠 자체 기사와 칼럼까지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악한 수준의 소식지였지만 거리에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민주부산'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막혀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던 진실과 투쟁 소식·지침을 시민에게 시시각각 알려주는 첨병 역할을 했다.

일례로 민주부산은 6월 18일 동구 좌천동 고가도로에서 다리 아래로 떨어져 숨진 이태춘 열사의 사망 원인에 대해 추락사라는 경찰 발표와 달리 최루탄 직격탄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민주부산 팀은 소식지 한 장을 전하려고 조를 짜서 한밤이나 새벽 주택가나 시장 등지에 민주부산을 뿌렸다.

때로는 인쇄소가 탄로나 완성된 소식지를 빼앗으려는 사복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묶은 끈이 터져 육교 아래로 떨어진 인쇄물을 일일이 줍는 일도 있었다.

하루 많게는 20만장까지 배포되는 소식지를 지역에 보급하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당시 국본 지도부였던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의 승용차인 스텔라로 손수 소식지를 나른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됐다.

민주부산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발표한 6·29 선언 이후 9월까지 발행돼 노동자 대투쟁을 측면 지원했다.

발행이 잠시 중단된 민주부산은 다음 해인 1988년 총선 때 재발행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동구 국회의원 출마를 지원했지만 이내 자취를 감췄다.


남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만들었던 신간도서 안내지가 계기가 돼 '민주부산'을 만들었고 지금도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다"며 "이름을 알리지 않은 많은 이들이 '민주부산'을 만들었듯이 6월 항쟁 역시 시민의 힘으로 만든 역사"라고 말했다.

남 대표는 "6월 항쟁과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국가가 보상했지만 여전히 고문 후유증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며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들이 새롭게 주목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win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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