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범이 택시타라는데 안 탔어" 기지 만점 할머니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보이스피싱범이 계속 전화를 끊지 마라, 현찰로만 돈을 찾으라고 하니까 뭔가 이상했지. 얼른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야 한다고 택시를 타라길래,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난 택시 못 탄다고 끝까지 안 탔어."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범의 현란한 말솜씨에도 기지를 발휘해 경찰에 신고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범인 검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 모(68·여) 씨는 하루 전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린다고 했다.
이씨는 2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보이스피싱범과 주고받은 전화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했다.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주민번호가 도용돼 신용카드로 500만원이 부정 사용됐다고 하지 뭐야. 말썽쟁이 아들이 하나 있는데 카드빚을 내가 다 갚아줘서 신용카드의 무서움을 아는데 그런 말을 하니 덜컥 겁이 났어."
이 씨는 "보이스피싱범이 은행계좌에 있는 돈을 다 인출해야 국가가 안전하게 보관해준다며 은행 잔액을 세세하게 물었다"고 말했다.
"부산은행에 30만원, 기초노령연금이 나오는 국민은행에 20만원 있다고 하니, 정기적금은 없느냐고 물어봐. 1년 만기인 1천600만원짜리 정기적금이 있다고 하니 무조건 빨리 찾아야 된다고 해."
이 씨는 "부산 영도 산꼭대기에서 은행까지 가려면 40분이나 걸린다고 하니까 택시를 타라는 거야"라며 "내가 폐지를 주워 하루에 3천원 버는데 그렇게는 못 한다고 끝까지 버스를 타고 갔어"라고 말했다.
은행을 가는 71번 버스 안에서 이 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휴대전화를 계속 끊지 말라, 은행에서 반드시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돈을 찾으라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이 씨는 은행에 앞서 대교파출소로 향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붙은 파출소에 가면 경찰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씨는 파출소에 들어가서 '쉿'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에 대고 행여 범인이 들을까 전화기를 멀리 떼고 경찰에게 자신의 상황을 은밀하게 전달했다.
보이스피싱 사건이라는 것을 직감한 파출소 경찰은 바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이 씨에게 여경을 동행케 하고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 씨는 "경찰이 옆에 있어 든든했지만 은행 인출내역서에 이름을 적으며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며 "보이스피싱범이 돈을 한꺼번에 찾으면 은행 직원이 의심할 수 있으니 집을 수리한다고 전부 현찰로 받으라고 지시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만원만 인출한 이 씨가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자 보이스피싱범은 구체적으로 인출내역을 확인했다고 한다.
총 인출금액, 현금·5만원권 여부 등을 꼬치꼬치 캐물은 보이스피싱범에게 이 씨는 "1천100만원을 전액 5만원권으로 찾았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 그림 아래 일련번호를 대라는 기습적인 요구에 이 씨는 원래 지갑 속에 든 5만원권 지폐를 꺼내 번호를 읽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씨는 "전화 속 남성이 이번엔 주민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며 집 냉장고에 돈을,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두고 가라고 했다"며 "이번에도 택시를 타라고 하길래 71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고 말했다.
집에 가서 수중에 있던 10만원과 인출한 2만원 등 총 12만원을 냉장고에 넣고 우편함에 집 열쇠를 두고 주민센터로 간 이 씨는 얼마 후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경찰로부터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사주를 받은 행동책 중국 교포 윤모(41) 씨가 이 씨의 집 우편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있는 12만원을 들고 나오는 순간 안방에 잠복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이 씨는 "보이스피싱 사건을 주의하라고 뉴스에서 본 거 같은데 내가 그 전화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며 "경찰의 도움으로 피해를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win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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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보이스피싱범이 계속 전화를 끊지 마라, 현찰로만 돈을 찾으라고 하니까 뭔가 이상했지. 얼른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야 한다고 택시를 타라길래,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난 택시 못 탄다고 끝까지 안 탔어."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범의 현란한 말솜씨에도 기지를 발휘해 경찰에 신고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범인 검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 모(68·여) 씨는 하루 전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떨린다고 했다.
이씨는 2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보이스피싱범과 주고받은 전화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했다.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주민번호가 도용돼 신용카드로 500만원이 부정 사용됐다고 하지 뭐야. 말썽쟁이 아들이 하나 있는데 카드빚을 내가 다 갚아줘서 신용카드의 무서움을 아는데 그런 말을 하니 덜컥 겁이 났어."
이 씨는 "보이스피싱범이 은행계좌에 있는 돈을 다 인출해야 국가가 안전하게 보관해준다며 은행 잔액을 세세하게 물었다"고 말했다.
"부산은행에 30만원, 기초노령연금이 나오는 국민은행에 20만원 있다고 하니, 정기적금은 없느냐고 물어봐. 1년 만기인 1천600만원짜리 정기적금이 있다고 하니 무조건 빨리 찾아야 된다고 해."
이 씨는 "부산 영도 산꼭대기에서 은행까지 가려면 40분이나 걸린다고 하니까 택시를 타라는 거야"라며 "내가 폐지를 주워 하루에 3천원 버는데 그렇게는 못 한다고 끝까지 버스를 타고 갔어"라고 말했다.
은행을 가는 71번 버스 안에서 이 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휴대전화를 계속 끊지 말라, 은행에서 반드시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돈을 찾으라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이 씨는 은행에 앞서 대교파출소로 향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붙은 파출소에 가면 경찰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씨는 파출소에 들어가서 '쉿'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에 대고 행여 범인이 들을까 전화기를 멀리 떼고 경찰에게 자신의 상황을 은밀하게 전달했다.
보이스피싱 사건이라는 것을 직감한 파출소 경찰은 바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이 씨에게 여경을 동행케 하고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 씨는 "경찰이 옆에 있어 든든했지만 은행 인출내역서에 이름을 적으며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며 "보이스피싱범이 돈을 한꺼번에 찾으면 은행 직원이 의심할 수 있으니 집을 수리한다고 전부 현찰로 받으라고 지시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만원만 인출한 이 씨가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자 보이스피싱범은 구체적으로 인출내역을 확인했다고 한다.
총 인출금액, 현금·5만원권 여부 등을 꼬치꼬치 캐물은 보이스피싱범에게 이 씨는 "1천100만원을 전액 5만원권으로 찾았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 그림 아래 일련번호를 대라는 기습적인 요구에 이 씨는 원래 지갑 속에 든 5만원권 지폐를 꺼내 번호를 읽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씨는 "전화 속 남성이 이번엔 주민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며 집 냉장고에 돈을,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두고 가라고 했다"며 "이번에도 택시를 타라고 하길래 71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고 말했다.
집에 가서 수중에 있던 10만원과 인출한 2만원 등 총 12만원을 냉장고에 넣고 우편함에 집 열쇠를 두고 주민센터로 간 이 씨는 얼마 후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경찰로부터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사주를 받은 행동책 중국 교포 윤모(41) 씨가 이 씨의 집 우편함에서 열쇠를 꺼내 집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있는 12만원을 들고 나오는 순간 안방에 잠복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이 씨는 "보이스피싱 사건을 주의하라고 뉴스에서 본 거 같은데 내가 그 전화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며 "경찰의 도움으로 피해를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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