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시원한 평양냉면에 '풍덩'

입력 2017-08-10 08:01  

[연합이매진] 시원한 평양냉면에 '풍덩'

겨울철 평양 음식에서 사계절 전국 음식으로 진화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냉면은 설렁탕과 더불어 대표적 전통서민음식으로 꼽힌다. 그중 평양냉면은 오랜 역사 속에서 신분과 계층을 떠나 두루 사랑받아왔다. 겨울 음식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사계절 음식이 됐다. 무더운 여름이면 그 청량한 맛을 찾는 식객들이 유명 식당마다 줄을 잇는다.






찜통더위의 한여름이어서 더 그럴까. 7월 중순 서울 도심의 한 평양냉면 전문식당. 평일인 이날 정오 무렵이 되자 식당 대기실은 몰려든 손님들로 크게 북적거렸다. 대기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손님들은 줄잡아 70여 명. 못해도 30분가량을 기다려야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지만 남녀노소의 대기 손님들은 시원한 냉면에 대한 기대와 설렘 때문인지 지루해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주 한 번 정도 이곳에 와서 평양냉면을 먹곤 하지. 젊은 날부터 그리했으니 벌써 60년쯤 됐나? 밥맛이 없을 때 냉면을 먹으면 개운하니 참 좋아!" 친구와 함께 왔다는 차원규(83) 할아버지는 시원한 국물맛에 매료돼 평양냉면을 종종 찾는다고 말한다.

70대 노부모를 모시고 식당에 온 채진(36·여) 씨는 "평소에 냉면을 종종 드시는 아빠가 이곳의 평양냉면을 한번 먹어보자고 '강추'하셔서 엄마랑 셋이서 왔다"며 "부드러운 면발과 담백한 국물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입맛을 다셨다.


◇ 겨울철 음식이 사계절 음식으로


냉면은 본래부터 여름에 먹는 음식이었을까. 아니다. 지금은 여름철의 별미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는 추운 겨울에 즐겨 먹었다고 한다.

냉면이 겨울철 음식이었던 것은 한민족의 전통 온돌문화와 관련이 있다. 겨울철이면 온돌의 온도 조절이 어려워 불을 많이 때다 보면 방바닥이 뜨거워지기 마련. 이때 차가운 국수 음식인 냉면은 더위를 식히는 데 딱 좋았다. 1849년에 나온 '동국세시기'는 "겨울철 제철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현대 들어 온돌의 온도 조절이 가능해지고 얼음도 언제나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냉면은 사계절 중 특히 여름철 별미 음식처럼 여겨진다. 차가움으로 무더위를 다스리는 '이냉치열(以冷治熱)'의 음식이 된 셈. 도심에서 종종 보는 '면옥(麵屋)'이라는 상호에서 알 수 있듯이 1년 365일 내내 평양냉면을 비롯한 냉면류를 파는 식당들이 그야말로 연일 문전성시다.

평양냉면의 역사를 좀 더 들여다보자. 평양냉면은 문헌적으로 고려 중기 때 유래해 조선 시대에 대중적 요리로 발전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너나없이 즐기는 대중음식이 된 것이다. 조선조의 숙종과 고종도 먹었다고 할 만큼 폭넓게 사랑받았다.

냉면이 언급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장유(張維·1587~1638)의 저서 '계곡집(谿谷集)'을 들 수 있다. 1635년 편찬된 이 문헌에는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紫漿冷麵)'라는 대목이 나온다. 냉면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였던 것.

1800년대 말엽의 '시의전서'는 냉면 편에서 "청신한 나박김치나 좋은 동치미국물을 말아 화청(和淸·음식에 꿀을 타는 것)하고, 위에 양지머리, 배, 통배추 김치를 다져서 얹고 고춧가루와 잣을 흩어 얹는다"고 냉면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현재 평양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메밀이 아닌 전분과 밀가루가 주재료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소바의 영향을 받아 메밀이 대거 들어가게 됐다는 것. 다시 말해 메밀이 중심이 되는 지금의 평양냉면은 먼 옛날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 역시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이자 진화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북녘땅에서 유래했어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식재료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평양냉면은 메밀을 많이 넣고 삶은 국수를 차가운 동치미국이나 육수로 만 장국냉면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함흥냉면은 감자 등의 전분을 넣고 뺀 국수를 매운 양념장으로 무치고 새빨갛게 양념한 홍어회를 얹은 비빔냉면이 일반적이다.

부드러운 면발의 평양냉면이 깔끔하다면 면발이 쫄깃한 함흥냉면은 맛이 새콤하다고 하겠다. 한편 남쪽 지역 특유의 냉면으로는 해물 육수를 사용하는 진주냉면이 있다.






◇ 평양냉면의 양대 요소 '육수 & 면'



보기만 해도 더위가 싹 가실 듯 시원해 보이는 육수가 크고 둥근 그릇에 넉넉히 담긴다. 그 청량한 육수에 풍덩 온몸을 내던져 담그고 있는 메밀국수 사리. 그 위로 무, 배, 오이가 얇게 썰어진 수육과 함께 오순도순 얹혀 있다. 이들 고명과 함께 한 쪽 육수에 둥둥 떠 있는 삶은 계란 반 토막. 한 그릇의 평양냉면은 이렇듯 단출해 보인다.

반찬은 또 어떨까? 작은 그릇에 담긴 무절임김치와 배추김치가 전부다. 일부 식당은 동치미 그릇 하나만 달랑 놓기도 한다. 주인을 따르며 모시는 시종의 모습이랄까. 이처럼 평양냉면은 단순·명쾌한 식재료와 상차림으로 식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평양냉면을 구성하는 양대 요소는 육수와 면이다. 소고기를 커다란 솥에 넣고 푹 끓여 우려낸 육수에 메밀을 주재료로 해 뽑아낸 국수 뭉치를 넣는 것. 물론 육수와 면을 만드는 방법은 식당마다 조금씩 달라 개성 있는 미감을 선사한다. 예컨대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넣는 식당도 있고 그러지 않는 식당도 있다.

서울 마포에 있는 대표적 평양냉면 식당인 '을밀대'의 요리법을 토대로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먼저 육수 내기다. 황소 고기의 각 부위를 골고루 커다란 솥에 넣고 10시간 동안 푹 끓여낸다. 가급적 자연에서 자란 시골 수소를 사용하기에 풍부한 영양과 담백한 맛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단다. 만들어진 육수는 일단 냉동창고에 보관한다.

다음은 국수 만들기. 메밀을 65%, 고구마 전분을 35% 분량으로 섞어 만든 반죽을 냉면기계에 넣으면 가늘고 하얀 국수가 순식간에 잘도 뽑혀 나온다. 이를 펄펄 끓는 대형 면수(麵水) 가마솥에 넣어 2~3분 동안 익힌 뒤 건져내 찬물에 넣고 휘휘 저어 헹군다. 그리고 이를 얼음물에 다시 담가 차갑게 한 뒤 손으로 둘둘 말면 국수말이 완성!

이렇게 공급된 육수와 면을 토대로 주방에선 냉면 음식 완성하느라 요리사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육수와 면 위에 무, 오이, 배, 계란, 사태 같은 고명을 살짝 올린 뒤 반찬과 함께 손님의 밥상으로 내간다.

이 식당에서 13년 동안 일하고 있다는 매니저 윤민정(51) 씨는 "정직하고 좋은 재료가 맛을 내는 데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우리 식당은 모든 재료를 100% 국산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 "맛이 담백하고 시원해요!"



자, 이제는 맛난 음식을 맘껏 음미할 시간.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든 최고의 요리라 할지라도 먹는 방법이 시원찮으면 그 묘미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맨 먼저 물컵에 담긴 따끈한 육수를 두어 모금 들이켜 속을 달랜다. 소의 잡뼈와 사골을 삶아 우려낸 이 육수는 냉면 맛을 극대화하는 마중물 구실을 해준다고 하겠다. 그런 다음 국수에 앞서 계란 고명을 먹으면 입안의 잡맛을 미리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이제 냉면을 본격적으로 먹을 차례. 국수 뭉치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육수에 면발이 충분히 풀리게 한 뒤 무김치 등과 함께 넣으면 후루루 순식간에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쾌감을 만끽하게 된다. 이때 면발은 가위 등으로 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는 게 좋다. 취향에 따라 겨자, 간장, 식초 등을 추가할 수도 있으나 이들 양념의 첨가 없이 그냥 먹었을 때 순수한 냉면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퇴직한 직장 선배와 함께 온 황경배(58) 씨는 "같이 일하실 때 선배님이 평양냉면을 워낙 좋아하셔서 오늘 이렇게 모셨다"며 ""시원한 국물과 고소한 면의 맛이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옆 테이블에서 며느리, 손녀와 밥상을 마주한 채 냉면 맛에 푹 빠져든 김원환(88)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맛이 강한 함흥냉면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담백하고 깔끔한 육수와 면발의 평양냉면에 더 끌린다"며 미소 짓는다. 손녀 김선영(31) 씨도 "역시 평양식인 녹두전을 추가하니 시원함과 따뜻함, 담백함과 기름짐이 어우러져 식탁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다"며 만족스러운 표정.

현재 서울에는 마포의 을밀대를 비롯해 중구의 남포면옥·평양면옥·필동면옥·우래옥·을지면옥, 종로의 봉피양 등 수십 년 전통의 평양냉면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맛 역시 평양의 본래 그것과 상당히 달라졌다고 할 만큼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평양냉면의 서울화, 전국화라고나 할까. 기본 틀은 대동소이하나 재료의 종류와 비율, 요리법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 나름의 개성을 새롭게 살려가고 있다.

을지로 남포면옥의 이재경(69) 대표는 "평양냉면이 북녘에서 유래했지만 남녘의 풍부한 식재료 등에 힘입어 질적으로 크게 높아졌다. 탈북자들도 남한의 평양냉면을 먹고는 평양의 대표식당 옥류관보다 더 맛있다고 말한다"며 활짝 웃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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