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인생플랜] (16)편안한 삶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

입력 2017-08-06 09:00   수정 2017-08-06 10:21

[100세 시대 인생플랜] (16)편안한 삶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

공직 명퇴 후 17년간 7천여 개 지팡이 무료 제작·보급 설재천씨

"작은 손재주로 노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매일 산에 오르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어르신들이 내가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걸 볼 때 뿌듯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전북 전주시 한 주택가 골목에는 '노인 건강 봉사의 집'이라는 특이한 문패가 걸려 있다.


병원도 아니고 약국도 아닌데 이곳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집주인은 '지팡이 전도사'로 불리는 설재천(78)씨.

이곳을 찾는 노인들은 "우리 같이 조금만 걸어도 무릎이 아픈 노인들에게는 의사와 같은 분"이라며 "여기 설씨 덕에 전주 시내 노인들은 편하게 걸어 다니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때 성실한 공무원으로 평판이 자자했던 설씨는 1998년 명예퇴직을 결심했다.

은퇴 이후 별다른 일 없이 무료한 하루를 보내던 그는 우연히 신문에 실린 기사를 접하게 됐다.

한 할머니가 노점상을 하면서 평생 모은 돈 3억9천만원을 전북대에 기탁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설씨는 이후 삼천동 한 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복지시설에 머무른 그는 문득 '지팡이가 있으면 노인들이 더 편하게 걸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설씨는 곧장 산에서 적당한 나무를 주워 지팡이를 만들었다.

깨끗하게 씻은 나무를 다듬고 니스칠을 해 동네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반응은 꽤 좋았다.

지팡이를 받아든 노인들은 "참 마음에 든다. 이제 무릎 안 아프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겠다"며 설씨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설씨는 노인들의 환한 웃음에 힘을 얻어 더 열심히 지팡이를 만들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면 산에 올라 지팡이 재료로 쓸 나무를 모았다.

노인들이 편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한쪽이 구부러지고 튼튼한 나무만 골라 배낭에 담았다.

4시간 넘는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설씨는 바로 나무껍질을 벗기고 사포질을 시작했다.

중간에 튀어나온 잔가지들은 가위로 모두 잘라냈다.

나무와 1시간 넘는 씨름 끝에 니스칠까지 마치면 노인들의 발이 되어 줄 새로운 지팡이가 탄생했다.

그는 17년 동안 이렇게 만든 지팡이 7천여 개를 지역 복지시설과 경로당, 주민센터 등에 나눠줬다.

'전주에 무료로 좋은 지팡이를 만들어주는 노인이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부산과 울산, 서울, 청주 등 전국 각지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 그에게서 튼튼한 지팡이를 받아갔다.

그는 멀리서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노인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집 앞에 큼지막한 나무 문패를 걸었다.

노인들에게 무료로 지팡이를 만들어 준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주시와 각종 사회단체는 앞다퉈 설씨에게 감사장과 표창을 수여했다.

지난해 10월 31일에는 국민대통합위원회가 발표한 '2016년 생활 속 작은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 그는 지팡이를 만들지 못 할 뻔한 적도 있었다.

작업공간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다 아들이 사준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지팡이를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소음과 분진, 이웃과의 마찰이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설씨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편한 삶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최근 약초에도 눈을 떴다. 지팡이 재료를 찾으러 산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영지버섯을 캐낸 것이 계기였다.

이때부터 그는 산에서 캐낸 오가피와 엄나무, 칡 등을 차로 우려내 경로당에 지팡이와 함께 가져다주고 있다.

경로당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은 설씨가 가져다준 약초 물을 보온병에 담아 마시며, 기력이 쇠하기 쉬운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는 노인들의 건강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이제는 지팡이뿐만 아니라 감태나무를 매끈하게 깎아 지압봉까지 만들고 있다.

어르신들이 딱딱하고 뾰족한 지압 도구를 쓰는 것을 보고 '조금 더 좋은 지압봉을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설씨는 "지금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다리로 매일 산을 다닐 수 있는 것이 행복하고, 작은 손재주로 몸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jay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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