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전형필의 문화유산 지키기

입력 2017-07-27 07:31  

[김은주의 시선] 전형필의 문화유산 지키기

(서울=연합뉴스) 1940년 어느 여름날, 경성제국대학과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 전신)에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국문학자 김태준은 제자인 서예가 이용준으로부터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태준은 몇 년 전부터 훈민정음의 존재를 수소문해오던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에게 이를 알리고 이용준의 경상북도 안동 시골집으로 내려가 훈민정음을 입수했다. 세종실록에 언급된 해례본이 틀림없었다. 다만 첫 두 장이 없었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뜯겨나간 두 장을 채워 넣기 위해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였던 김태준은 1941년 검거됐다. 2년 후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태준은 훈민정음의 보관 사실을 전형필에게 밝혔고, 그동안 훈민정음의 행방을 애타게 기다려온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천 원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 원을 지불했다.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민족혼을 살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이 그 정도의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말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일제는 훈민정음을 찾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해방이 되자 이 책은 당당하게 세상에 나왔다. 국보 제70호가 바로 이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사후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된 데 이어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낙장 두 장을 복원하여 훈민정음 해례본 정본을 제작할 계획이다.





전형필은 1906년 7월 29일 서울 배오개(종로 4가)에서 거부 전영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형필의 외사촌 형이 역사소설가 박종화이다.

전형필은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 고희동이 미술 교사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전형필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과에 진학했다. 1928년 방학을 맞아 귀국한 전형필은 고희동의 소개로 한학의 대가이며 민족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인 오세창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를 드나들게 됐다. 오세창은 그에게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서화 골동의 감식안을 길러주었다.

1929년 부친의 사망으로 전형필은 젊은 나이에 대지주가 됐다. 논이 800만 평이 넘었고 매년 2만 석의 쌀을 수확했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전형필은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조선의 중요한 문화재를 수집해 나갔다.

그는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으로 안목을 키워나갔고, 거간 이순황과 일본인 골동상 신보 기조의 중개로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했다. 1934년 한적한 교외였던 성북동 초입에 프랑스인 소유의 서양식 주택과 주변 땅을 매입하여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문화재를 수집하여 보호하는 한편 우리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절 박물관을 지은 것은 해방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2층 콘크리트 건물로 박길용이 설계한 보화각은 1934년 시공에 들어가 1938년 준공됐다. 보화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으로, 후에 전형필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했다.

전형필은 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1940년 6월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했다. 그는 해방 후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간 맡았으며 1948년 건국 후에는 문화재 보존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중 중요한 수집품을 기차에 싣고 피난을 떠났으나 가져가지 못한 수만 권의 책과 서화, 도자기들은 아깝게도 모두 훼손됐다. 농지개혁 당시 토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은 전쟁통에 휴짓조각이 됐고 1959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재정 사고로 전형필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형필은 자신의 수집품을 지켰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미술사 학회지인 '고고미술'의 창간을 주도했다.

전형필은 1962년 초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형필 사후 1966년 후손들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수집품의 체계적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가을 '겸재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 소장품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는 해방 후 가치를 인정받아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동국정운(국보 제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등 12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수집품 중에는 보물 10점, 서울시 유형 문화재 4점이 포함됐으며 나머지도 우리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청자 절정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형필이 수집한 청자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 동국정운은 한글 창제 이전 한자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도록 지침을 실은 문법책으로 제1권과 제6권만 전해진다.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은 563년 제작된 대표적인 불교 유물이다. 혜원전신첩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으로, 조선 후기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 30점이 수록돼있다.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자신의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생각했다. 한국전쟁 당시 품속에 넣고 피난을 갔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어 지켰다고 한다. 해례본은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한글을 만든 목적과 원리,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대왕은 한글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고 해례본도 함께 배포했다.







전형필은 젊은 나이에 '조선거부 40인'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돈뿐만 아니라 문화재의 진가를 알아보는 혜안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편하게 사는 대신, 그 많은 재산과 젊음을 바쳐 어렵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 그가 문화재를 수집한 이유는 골동 취미도 아니었고, 개인의 명예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고 했던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과 이들의 교사를 받은 조선인들이 고분을 도굴하고 폐사지의 유물을 탈취하는 등 절도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우리 문화재가 골동 가치로 평가되어 일본인들의 손으로 무한정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전형필은 수많은 불상과 부도, 서화, 도자기, 석탑, 서적들을 수집하여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고,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문화재 중에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면 돈을 얼마를 들여서라도 다시 가져왔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과 보존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문화유산 독립운동가'라고 하겠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법으로 반출돼 미국으로 흘러들어 갔던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가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전용기에 실려 국내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이 2013년 어보를 도난품으로 판단, 미국 당국에 수사를 요청한 지 4년 만이다. 그동안 진품 확인과 법적 소송 절차 등을 거쳐 최종 반환됐다.

여전히 많은 우리 문화재가 외국에서 떠돌고 있다. 문화재는 국가의 자존심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재 환수에 나설 필요가 있다. 전형필의 헌신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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