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2006년 4월 26일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국정과제회의를 열어 대통령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법무부·교육부·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 등과 함께 마련한 '여성결혼이민자가족 및 혼혈인·이주자의 사회통합을 위한 지원대책'을 확정했다. 2005년 국제결혼 비율이 전체 결혼 건수의 13.6%에 이를 만큼 다문화가정이 늘어난데 이어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골자는 라이따이한(한국계 베트남인)이나 코피노(한국계 필리핀인)에게 한국 국적 부여, 국제결혼중개업 관리 법률 제정, 여성결혼이민자 사회보장 지원 강화, 불법체류자 자녀 아동 취학 지원, 다문화 교육 강화, '혼혈인' 대체 용어 지정 등이었다. 노 대통령은 "다인종·다문화로의 진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서 "양적으로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규제 등 속도 조절이 필요하고 질적 측면에서 이주자 인권 신장을 위한 다문화정책을 본격 추진하는 등 포용 노력을 강화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부처별로 혼재된 외국인 및 이민정책을 통합 조정하는 총괄기구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정부 다문화정책의 시작이었다.
#2. 2006년 5월 25일 노 대통령 내외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 농촌의 결혼이주여성 가정을 찾았다. 필리핀 출신 에미레(38) 씨는 94세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그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효행상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효도를 한국 사람만 하는 줄 알았는데 에미레 씨를 보고 사람 사는 이치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눈, 머리카락, 피부 빛깔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제도와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세계화는 휴대전화 팔아먹는 시장이 전 세계에 걸쳐 있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며 "앞으로는 생각하는 방식과 문화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을 말하고, 그 가운데는 사람 피가 섞이는 것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3. 2006년 5월 26일 청와대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인정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노 대통령, 위원장인 한명숙 총리를 비롯한 17개 관계부처 장관, 민간위원 7명이 참석해 관련법 제정 방향과 총괄기구 설치 방안 등을 논의했다. 민간위원 가운데는 문재인 정부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에 오르는 정현백 한국여성연합 공동대표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 사람의 인권도 존중하고 이를 확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진보라 할 수 있다"면서 "여러 문화와 교류하고 통합하는 것은 세계 문명사 흐름과 같은 방향이고 국가 발전전략에도 맞다"고 역설했다. 입법에도 적극 나서 2007년 5월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이 제정된 데 이어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탄생했다.
#4. 2017년 3월 4일, 11년 전 정부 다문화정책이 태동할 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던 문재인 대통령 예비후보는 코리아평화네트워크가 주최한 국민대통합 포럼에서 "다문화가정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대한민국 품에 안긴 다민족과 이주민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화답하듯 대선 기간에는 이주민들의 문 후보 지지 선언이 잇따랐고 20여 개국 출신 귀화자 40여 명으로 구성된 무지개 유세단이 거리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공약집에 ▲결혼이민자 정착 및 인권 보호를 위한 종합지원체계 확립 ▲다문화가족 자녀 학습 및 정서 지원을 위한 생활-학습 돌봄 멘토링 사업 실시 ▲다문화가족 자녀 교육권 보장을 위해 특별학급과 대안학교 지원 ▲국민 대상 다문화 수용성 교육 내실화 및 확대 등을 담았다.
지난 11년간 대통령의 얼굴은 세 차례 바뀌었지만 정부의 다문화정책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관련 예산과 인력이 늘어났고 법과 제도도 꾸준히 개선됐다. 그러나 정책 도입 당시와 비교해 여건은 상당히 달라졌다. 국제결혼 건수는 2005년 4만2천여 건에서 2015년 2만1천여 건으로 줄었고 귀화자와 다문화가족 증가세도 눈에 띄게 둔화했다. 대신 결혼이민자와 귀화자의 정착 기간은 늘어나 10년 이상 체류 비율이 2012년 36.1%에서 2015년 47.9%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다문화 자녀의 평균연령도 높아져 만 6∼18세 비율이 2010년 42.7%에서 50.3%로 증가했다. 결혼이민자의 이혼·별거·사별로 인한 한부모가족 비율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6월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만 명을 돌파한 가운데 모국 귀환 재외동포와 유학생이 급증하는 등 외국인 비율과 직업별·국적별 구성 등도 바뀌고 있다.
글로벌화 추세에 따라 국민의 다문화 인식은 상당히 개선되긴 했으나 사이버공간을 중심으로 외국인이나 귀화인 등에 대해 거부감과 혐오감을 드러내는 반다문화 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제적으로도 난민과 테러 등의 증가와 함께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는 자국우선주의를 넘어 배타적 애국주의(쇼비니즘)가 번져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문화정책의 시동을 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치관을 공유해온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새 정부의 다문화정책이 기대를 모은다. 다문화가족 주무부처인 여가부의 정현백 장관도 여성운동에 헌신해오며 외국인정책회의 민간위원으로도 활동한 인물이어서 차별 철폐와 소수자 배려에 정책의 무게를 둘 것으로 전망된다. 비단 대통령과 장관의 가치관이나 이력이 아니더라도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며 여기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야 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이다. 달라진 안팎의 여건에 대응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획기적이고 실질적인 다문화정책이 나오기를 많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
3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연합미디어센터 17층 연우홀에서는 다문화정책 담당자를 비롯해 학자, 법률가, 결혼이주여성, 현장 활동가,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모여 새 정부의 다문화정책을 점검하는 다문화 포럼이 열린다. 2013년부터 해마다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연합뉴스가 개최해온 이 포럼에서 올해도 좋은 의견이 많이 쏟아져 진지하고도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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