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 체육("야구가 하고 싶어요" 단식투쟁 감행한 이승엽…)

입력 2017-10-04 10:44   수정 2017-10-04 10:45

[고침] 체육("야구가 하고 싶어요" 단식투쟁 감행한 이승엽…)

"야구가 하고 싶어요" 단식투쟁 감행한 이승엽, 한국야구 역사로

어린 시절 '단식 선언'하며 야구 시작, 프로 입단은 투수로

'삼성의 박철순'을 꿈꿨지만, 타자로 전향해 아시아 홈런왕

KBO리그 최초 은퇴 투어…가장 사랑받은 야구 선수로 기억





(대구=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대구시 수성구 야구전설로 1번지.

삼성 라이온즈의 홈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의 주소다.

이곳에서 이승엽(41·삼성 라이온즈)은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뜨거운 박수 속에 은퇴식을 열었다.

야구 팬이면 모두 짐작할 수 있듯, 라이온즈 파크 주소 안에서는 '이승엽'을 발견할 수 있다. '야구전설' 이승엽을 떠올리며 붙인 도로명 주소다.

그렇게 이승엽은 '전설'로 걸어 들어갔다.





◇ 한국야구 역사를 바꾼, 이승엽의 단식 선언 = 전설의 시작은 '단식투쟁'이었다.

"아버지, 야구 못 하게 하시면 저 밥 안 먹겠습니다."

이춘광 씨는 순둥이 막내아들의 단식 선언에 놀랐다.

1986년 동덕초교에 다니던 이승엽은 4학년 때 대구시 멀리 던지기 대회에서 3등을 했다.

중앙초교 신용석 야구부장이 이승엽에게 '접근'했다. "너 야구하고 싶지?" 이승엽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네, 시켜주실 수 있나요?"

신 부장은 한 달 동안 이승엽의 집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반대하고, 이승엽은 "야구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춘광 씨는 "그 시절만 해도 야구를 하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며 "야구하다 실패하면 건달이 되지 않겠나. 승엽이에게 '안 된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이승엽은 '단식 선언'까지 하며 고집을 피웠다.

신 부장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야구를 시켜보라"고 설득했다.

이춘광 씨는 "사흘 동안 고민을 하고 승엽이에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승엽이가 그 어린 나이에 진지하게 '후회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며 "그렇게 허락을 하니 바로 야구를 하러 뛰어가더라"고 회상했다.





◇ 초창기 이승엽의 꿈은 '삼성 좌완 에이스' = 이승엽은 '삼성의 왼손 박철순'을 꿈꿨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1982년) OB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 투수다.

이승엽은 경북고 2학년이던 1993년 청룡기대회에서 우수 투수상을 차지하고, 청소년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유망한 왼손 투수로 자랐다.

삼성도 처음에는 이승엽을 투수(고졸 우선지명)로 뽑았다. 이승엽도 "삼성 왼손 에이스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춘광 씨는 "승엽이가 '박철순 같은 투수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솔직히 속으로 웃었다"며 "박철순이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이승엽은 '왼손 박철순'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섰다.

이승엽은 1995년 삼성 입단과 동시에 왼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승엽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우용득 당시 삼성 감독은 "이승엽이 8월에야 공을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 배팅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길래 박승호 타격코치와 상의했다"며 "전반기까지만 승엽이를 타자로 써보자고 했다"고 떠올렸다.

이승엽은 "팔이 다 나으면 다시 투수하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이승엽의 생각이 바뀌었다.

우용득 전 감독은 "팔이 다 나았을 때 '승엽아,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니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타자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승엽은 "투수를 했으면 평범하게 10년 야구하다가 은퇴했을 것이다. 타자 전향이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앞서 이승엽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수능 기준선(200점 만점에 40점) 이하로 점수를 떨어뜨렸다.

'단식투쟁'에 이은 두 번째 '반항'이었다. 이 반항은 한국야구 역사를 바꿨다.






◇ 아기 사자에서 맹수로…이승엽이 만든 홈런 역사= '아기 사자' 이승엽은 곧 맹수가 됐다.

입단 3년 차인 1997년 32홈런으로 최연소 홈런왕에 오르더니 1999년 54홈런으로 한국의 홈런 역사를 바꿔놨다. KBO리그 최초로 50홈런을 넘었다.

4년 뒤인 2003년, 이승엽은 자신의 기록을 바꿔놨고 당시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웠다.

이승엽은 2003년 홈런 56개를 쳤다. 이승엽이 54홈런을 넘긴 순간부터 삼성 경기가 열리는 날, 외야석에서 이승엽의 공을 잡으려는 야구 팬으로 가득 찼다.

팬들은 잠자리 채, 대형 글러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승엽의 홈런공을 잡으려고 했다. 이승엽이 만든, 이색 풍경이었다.

한일통산 정규시즌에서 626홈런을 친 이승엽은 포스트시즌과 국제경기에서도 수없이 극적인 홈런을 날렸다.

이승엽은 한국 포스트시즌에서 64경기를 뛰며 14개의 홈런을 쳤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국제대회에서는 48경기 11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이 '평생 기억에 남을 홈런'으로 첫손에 꼽는 홈런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나왔다.

이승엽은 그해 11월 10일 대구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6-9로 뒤진 채 9회 말 1사 1, 2루, 동점 3점포를 터트렸다.

이전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의 극심한 부진을 겪은 그는 이 홈런으로 응어리를 풀었고, 곧바로 나온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이 우승을 확정하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에서도 이승엽은 펑펑 울었다.

2-2 동점이던 8회 말 1사 1루 이승엽은 일본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역전 결승 투런포를 쳐냈다.

이승엽은 경기 뒤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아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승엽은 "예선리그에서 너무 부진했다. 일본과의 준결승에서도 삼진-병살타-삼진으로 세 타석을 보냈다"며 "정말 미칠 것 같았는데 절박한 순간에 홈런이 나왔다.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포문이 열리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승엽은 다음날(8월 23일)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1회 초 결승 투런포를 쳐냈고, 한국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일본 생활과 국내 복귀…극복의 역사 = 이승엽도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시즌이 있다.

그는 도전했고, 때론 실패했고, 상처도 받았다. 그러나 늘 다시 일어섰다.

2004년 일본(지바롯데 마린스) 진출 첫해 이승엽은 큰 고비를 맞았다.

그는 지바롯데 코치로 일하던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죽을 각오로 할 수 있나. '한국 홈런왕'의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가."

김성근 감독의 물음에 이승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승엽은 거의 매일 야간훈련을 했다. 2004년 14홈런에 그쳤던 그는 2005년 30홈런을 치고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요미우리에서도 이승엽은 승승장구했다.

2006년 41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일본 야구의 상징인 '요미우리 4번타자'로 올라섰다. 2007년에도 30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8년 부상이 겹치면서 45경기만 뛰며 8홈런에 그쳤다.

이승엽은 반등하지 못했고, 2011년 시즌을 마치고 국내 복귀를 택했다.

2012년 한국 무대로 돌아온 이승엽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혹평과 싸웠다.

이승엽은 가장 먼저 그라운드에 나와 훈련을 했다. 그는 자신을 더 혹독하게 다스리며, 혹평과 싸웠다.







◇ 명예로운 은퇴…KBO 첫 은퇴 투어 = 이승엽은 마지막까지 팀에 필요한 선수였다.

그리고 모두가 미련을 가질 때, 은퇴를 예고했다.

국내 복귀 첫해인 2012년 이승엽은 타율 0.307, 21홈런을 기록하며 정규시즌·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다.

2013년 0.253, 13홈런으로 주춤했지만 절치부심해 2014년 최고령 타율 3할·30홈런·100타점(0.308·32·101)도 달성했다.

이승엽이 전성기 시절에 근접한 성적을 올리면서 삼성 타선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이승엽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나는 이제 중심 타자가 아니다"라고 자신을 낮췄다.

그리고 2015년 시즌 종료 뒤 "2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KBO와 각 구단은 "이승엽의 은퇴 시즌에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며 '은퇴 투어'를 열었다.

이승엽은 각 구장의 마지막 방문 경기 때 팬들과 인사할 기회를 얻었다. 의미 있는 선물도 참 많이 받았다.

이승엽이 한국야구에 안긴 추억에 답하는 '답례품'이었다.

이승엽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각 구단과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경기장 밖에서도 이승엽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별다른 구설 없이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이춘광 씨는 "어린 시절 아들에게 회초리도 여러 번 들었다. 칭찬보다는 혼을 낸 적이 많았는데 아들이 정말 잘 자라줬다는 생각이 든다"며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얘길 이젠 할 수 있다"고 했다.

야구전설로 1번지 라이온즈 파크에서 이제 더는 '타자 이승엽'을 볼 수 없다. 벌써 이승엽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이렇게 '이승엽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승엽은 "국민타자로 지내는 게 정말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행복한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이승엽의 시대'를 함께 보낸 야구 팬들은, 이승엽 덕에 행복한 날이 많았다.







jiks7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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