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미술가들이 자신의 '얼굴'로 말해온 것들

여성 미술가들이 자신의 '얼굴'로 말해온 것들

프랜시스 보르젤로 책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껏 부풀린 머리에 화려한 차림새의 여성이 자신만만한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영국 화가 마리아 코스웨이(1760~1838)가 27살에 그린 자화상이다.

판화로만 전하는 이 작품은 여느 미술가 자화상과는 다르다. 붓이며 팔레트며 작업 도구를 찾아볼 수 없다. 미술가라기보다는 미모의 귀족 부인처럼 보인다. 신간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아트북스 펴냄)의 저자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자화상의 주인공이 팔짱을 낀 점을 주목한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드러냈고 전문 교육을 받았던 코스웨이는 21세에 왕실 화가와 결혼했다. 그는 1780년대 내내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 전시했지만, 갈수록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다. 코스웨이의 묶여있는 손은 가정에 머무르길 원했던 남편의 속박 속에서 점차 뒷걸음치던 작가로서의 삶을 암시한다.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파블로 피카소, 오귀스트 로댕 등 친숙한 서양 미술가들에 가려진 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미술가들, 그들의 작업 중에서도 특히 간과됐던 자화상을 파고든다.

중세부터 현재까지 여성 미술가들의 자화상 복제본을 수집하던 저자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 이미지를 정리하면서 시대별 특징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책은 1402년에 출간된 책의 삽화 속 마르시아의 초상화 제작 모습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여성 미술가들의 다채로운 자화상을 통사적으로 소개한다.

16세기 작가들은 교양과 품위 있는 여성임을 '증명'하고자 음악적 재능까지 드러내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여성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7세기다. 페미니즘 화가로 주목받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도 이 시기에 활동했다.

19세기에는 여성이 미술 교육을 받을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세기 여성 예술가들은 남성과 같은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

저자는 단순히 여성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 작가가 사회 변화와 시대 제약 속에서도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읽어내려 애썼다.

미술가 자화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떠한 생각을 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언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남성이 주도하는 미술계 안에서 자신의 현실을 전하는 독창적인 자화상을 제작하고자 애썼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다.

"여성은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하면서 자화상의 범위를 확장하고 변화시켰다. 따라서 여성의 자화상은 독자적인 하나의 장르로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

책은 1998년 처음 출간됐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판은 2016년 영국에서 출간된 개정증보판을 번역한 것으로, 오늘날 '셀카' 시대의 여성 자화상까지 범위를 넓혔다.

주은정 옮김. 368쪽. 2만5천 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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