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격차'가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이지 않게 한다

입력 2017-10-26 07:31   수정 2017-10-26 13:47

'공감격차'가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이지 않게 한다

신간 '보이지 않는 고통'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최근 질병의 원인을 의학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에서 찾는 책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펴낸 '굴뚝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다양한 직업병과 산업재해 사건들을 다룬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에 상처를 주는지를 실증적 데이터로 보여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건강격차'는 저명한 사회역학자 마이클 마멋이 건강과 의료의 문제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임을 주장하는 책이다.

신간 '보이지 않는 고통'(동녘 펴냄)도 이런 책들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인 캐런 메싱 캐나다 퀘벡대 명예교수는 37년간 노동자들을 아프게 하는 작업환경을 연구해 온 학자다.

메싱은 회고록 성격의 책에서 구체적인 연구결과를 보여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서서 일하는 마트 계산원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것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계산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산원들이 고객을 상대할 때 서 있어야 하는 이유로 앉아있으면 고객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의사들이 환자를 만날 때 서서 인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 위해 고통을 꾸며내거나 과장한다고 여기는 과학자들도 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공감격차'로 부른다. 공감격차는 과학자나 정책결정권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을 뜻한다. 책은 저자가 경험한 과학계의 공감격차 사례들을 생생히 소개한다.






작업 자세 전문가였던 한 과학학술지 편집장은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제기하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압박스타킹과 좋은 신발을 해법으로 제시하던 이 편집장은 박물관에서 오래 그림을 관찰했을 때 생기는 다리와 허리 통증을 이야기하자 '아, 박물관 피로(museum fatigue) 말이죠'라며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근골격계 질환인 외상과염은 흔히 '테니스 엘보'로 불린다. 테니스를 두 시간쯤 친 사람에게 테니스 엘보를 흔쾌히 진단하는 의사라도 반 년간 주당 50시간씩 전선을 잡아당기고 벗겨내는 공장 근로자들이 정확히 같은 근골격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그들은 테니스 치고 박물관에 가기 때문에 테니스 엘보와 박물관 피로는 이해하지만, 반복적인 육체노동 경험은 거의 없어 전선 피복을 벗겨내는 노동자들의 문제에 공감할 수 없고 그들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감할 준비가 됐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도록 훈련받는 과학자들은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판단을 유보한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5% 이상의 가능성이 없으면 '직접 관련성이 없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책은 순수과학과 달리 보건과학의 모호함과 판단 유보는 여러 위험 요소로부터 악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방치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장시간 서서 근무하는 것은 당장 쉽게 눈에 띄는 건강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명확하게 인과 관계를 따지기도 쉽지 않다. 50대 영업직 여성이 만성 요통과 하지 부종, 하지 정맥류를 앓고 있다면 정상적인 노화현상과 서 있어서 생기는 증상을 명백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의사에게는 서서 일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계산원에게는 서서 일해야 예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통계적 유의성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으면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공감격차'에서 비롯된다.

책의 또 다른 차별화 지점은 여성 노동자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1943년생으로 여성 노동자는커녕,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던 시절을 살아온 저자는 여성 과학자이자 싱글 워킹맘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마트 계산원, 청소노동자 등 소외된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한다.

번역에 참여한 김인아 한양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과학자들이 고결하게 구사하는 수많은 모호함과 판단의 유예가,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해 가진 막연한 계급적 우월함과 노동에 대한 무시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에 대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이 철저히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를 들을 때에야 비로소 그 현실이 오롯이 드러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김인아·김규연·김세은·이현석·최민 옮김. 296쪽. 1만6천500원.

zitron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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