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짱 도루묵이 겨울철 별미 음식으로
(양양=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해 오름의 고장인 강원도 양양(襄陽). 거대한 산과 광활한 바다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다. 고봉준령의 설악산과 망망대해의 동해 사이에 놓인 아담한 항구 물치항. 초겨울이면 이곳에서 도루묵축제가 열려 식도락가들의 발길을 불러모은다. 올겨울로 9회째를 맞은 '양양 물치항 도루묵축제'다.

"해마다 연말이면 우리 동네에 도루묵이 개락이래요, 개락!"
'개락'은 '매우 많다'는 뜻의 방언. 양양 물치항 부두의 축제장에서 만난 마을주민들은 도루묵 자랑으로 신바람이 났다. 축제 진행에 기꺼이 동참해 온종일 종종걸음치며 방문객의 밥상으로 도루묵 음식을 나르면서도 피로를 잊은 채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처럼 도루묵은 한때 별 볼 일 없는 바닷물고기로 푸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철의 별미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물치마을이 매년 축제를 열어 환대할 만큼 겨울철 진객으로 껑충 뛰어오른 것. 물치항의 효자격인 도루묵은 근래 들어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 1등 못 해도 즐거운 '뜯기 체험'
겨울의 어귀로 막 접어든 12월 1일 오후의 물치항 부두마당. 살이 오를 대로 오르고 알이 찰 대로 꽉 찬 도루묵들이 촘촘히 박힌 그물이 바닥에 널따랗게 펼쳐지자 축제 방문객들은 호기심과 기대 가득한 얼굴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축제의 최대 이벤트인 도루묵 뜯기 체험 행사가 펼쳐진 것이다. 이 행사는 여성부와 남성부로 나뉘어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주어진 시간은 10분입니다! 딱 10분! 그럼 시~~작!"
사회자로 나선 품바 각설이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시작 신호를 던지자 참가자들은 도루묵을 뜯어내 비닐봉지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뜯어 담는 만큼 모두 가져갈 수 있어 손길은 더욱 바빴다. 구경꾼들은 웃음 띤 얼굴로 '즐거운 먹이 다툼'의 한마당을 지켜봤다.
"너무너무 좋아요! 친구들하고 나눠 먹을래요! 축제에 처음 왔는데 횡재했네, 횡재했어!(웃음)"
9.8kg을 담아 여성부 1등을 한 이미숙(50·경기 안산) 씨는 덤으로 5만원짜리 상품권까지 건졌다며 연신 싱글벙글했다.
이어 열린 남성부에 참가한 신병철(56·경북 포항) 씨는 "1등 상을 못 타긴 했지만 아쉬울 게 없어요. 담은 만큼 다 내 것인데요, 뭐!"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 순서는 방문객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도루묵 맘대로 뜯기.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도 너나없이 달려들어 그물코에 매달린 도루묵을 따느라 분주했다.
"도루묵이 잘 안 따져요! 그래도 재밌어요!"
경기도 의정부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오정호(10)·정우(5) 어린이는 "만져보니 물고기의 살이 미끄럽고 부드럽다"며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수산물 축제인 물치항 도루묵축제는 양양군 강현면의 물치어촌계가 겨울철 대표 어종으로 자리매김한 도루묵의 소비를 촉진하고 물치항을 관광어항으로 키우기 위해 시작했다. 매년 축제 기간에는 물치항의 활어회센터 입주상인들이 개인영업을 멈추고 참여함으로써 마을주민과의 단합을 도모한다.
이번 축제는 12월 1~3일 31개 입주상가 상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12월 2~3일 한 차례씩 마련된 도루묵 뜯기 체험 외에 도루묵 화로구이 체험 등 먹고 즐기는 자리가 사흘 내내 이어졌다. 도루묵의 대표 음식인 찌개와 조림, 찜, 칼국수, 회, 튀김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다.

◇ 피란길 선조가 먹었다는 도루묵 어원은
축제 주인공인 도루묵은 어떤 물고기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어원설과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가 조선시대 선조와 관련된 것.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한 어부가 건져 올린 생선을 먹게 됐다. 맛이 별미로 느껴졌던 선조가 그 이름을 묻자 어부는 '묵'이라고 대답했단다. 선조는 이름이 맛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즉석에서 '은어(銀漁)'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로써 도루묵의 반열이 일시에 껑충 높아졌다.
전쟁 후 환궁한 선조는 피란지의 물고기 맛이 생각나 다시 먹어봤으나 예전과 같은 맛이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선조가 "에이, 도로(다시) 묵이라고 해라"라고 명했다는 것.
이에 대해 조항범 충북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저서 '우리말 어원 이야기'에서 선조의 몽진길 고생담과 결부된 엉뚱한 어원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16세기 문헌에 나오는 '돌목'에서 유래했다고 덧붙인다. '흔하고 질이 떨어지는'이라는 의미의 접두사로 쓰이는 '돌(石)'과 물고기의 눈을 뜻하는 '목(目)'이 합해져 탄생한 명칭이라고 주장한다. '돌목'이 '도르목' '도로목'을 거쳐 '도루묵'으로 변화했다는 얘기다.
도루묵은 찬바람 부는 늦가을부터 잡히기 시작해 12월에 맛이 가장 고소하면서도 담백해진다. 선조가 먹은 도루묵이 특별히 맛있게 느껴졌던 건 그때가 도루묵의 제철인 초겨울 무렵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고달픈 피란길의 허기질 때 먹어서였을까?
성어의 몸길이가 보통 20cm 안팎인 도루묵은 측면이 납작하고 몸의 앞부분은 높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주둥이와 눈이 크고 비늘이 없는 게 특징. 흑갈색 무늬가 산재한 등은 황갈색 바탕이지만 배 부분은 은백색이다.
산란기는 11월과 12월로 수심이 얕은 지역의 해초류 군락에 알을 낳는다. 이 시기에 도루묵이 가장 맛있는 것은 바로 산란기이기 때문이다. 암컷과 수컷의 값 차이도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동해안이 '물 반, 도루묵 반'이라고 할 만큼 도루묵은 풍어를 이룬다. 알 많고, 살찐 도루묵을 지천으로 잡을 수 있어서다. 특히 명태, 오징어 등 동해의 주류 어종이 근래 들어 급감하면서 도루묵의 성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 "색깔과 모양이 신기해요"…꽉 찬 알은 입안에서 '오도독'
축제장 곳곳에 비치된 수족관에서는 고만고만한 도루묵 성어들이 날렵하게 헤엄치며 구경꾼들의 눈길을 모았다. 갈색의 등과 은색의 배를 가진 도루묵 떼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뜬 채 군무라도 하는 듯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이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박가영(13·인천) 양은 "도루묵을 처음 보는데 생김새가 참 예뻐요! 색깔과 모양이 신기해요!"라며 탄성을 터트렸다.
올겨울 어획량은 예년보다 많이 줄었다는 게 어촌계의 설명. 하지만 축제장에서는 싼값으로 풍성한 양의 도루묵을 사갈 수 있어 방문객들에게 또 다른 기쁨을 안겼다. 암도루묵의 경우 20마리 한 상자, 수도루묵은 100마리 한 상자에 각각 2만원에 판매됐는데 암수가 이처럼 차이 나는 건 역시 알 때문이란다.
알이 탱탱하게 들어 있는 암컷은 수컷에 비해 여러 배가 비싸다. 경기도 광주에서 온 강경은(56·여) 씨는 "우리 부부는 알맛으로 먹어요. 도루묵은 쪄서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좋고, 조림으로 먹어도 좋지요. 그래서 두 상자나 샀다"며 흡족한 얼굴이었다.
부두의 물양장 바로 뒤의 대형 천막 아래에서는 싱싱한 도루묵을 구워 먹는 방문객들로 온종일 붐볐다. 설치된 소형화로는 모두 100여 개. 까만 번개탄에 주황색 불꽃이 이글이글 피어오르면 석쇠 위에 놓인 도루묵들이 맛깔스레 구워지며 입맛을 다시게 했다. 1만5천원을 내면 40마리 분량의 도루묵 한 바구니가 소주 한 병이 곁들여져 나왔다. 화로를 가운데 두고 가족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솔솔 피우면서 도루묵 맛을 맘껏 즐겼다.
가족과 함께 왔다는 전형도(44·서울) 씨는 "도루묵구이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에 끌려 올해로 세 번째 축제장을 찾았다"며 "집에서 먹는 맛과 여기서 먹는 맛이 많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인근의 인제군에서 마을친구 다섯 명과 손잡고 찾아온 신덕선(80) 할머니는 들려오는 품바 장단 소리에 구이를 먹다 말고 발딱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더니 "우리는 이렇게 멋지게 산다오! 이리 와서 하나 잡숴봐!"라며 야들야들하게 구워진 고기 두 토막을 인심 좋게 내밀었다.
바로 옆의 천막 식당도 음식을 즐기는 손님들로 북적대긴 마찬가지였다. 어촌계와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운영하는 먹거리축제 현장인 이곳에서는 구이를 제외한 찜, 찌개, 조림, 튀김, 칼국수 등 다양한 종류의 도루묵 음식을 싼값에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방문객 김애경(60·경기 부천) 씨는 "처음 와봤는데 맛도 좋고 양도 많아 후한 인심을 느꼈다"며 "입안에서 오도독 씹히는 알맛이 일품"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마을주민 박영자(65) 씨는 "축제 봉사하느라 온종일 정신없이 바쁘지만 손님들이 맛있게 드시고 오길 잘했다고 할 때 정말 큰 보람을 느낀다"며 환히 웃었다.


일거양득이었다. 방문객들은 조그만 해안 마을이 주최한 작은 축제에서 다양한 맛과 함께 주변의 멋진 풍광까지 완상할 수 있어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물치항 입구에서는 하얗고 붉은 색깔의 송이버섯 모양 등대 한 쌍이 마주 선 채 드넓게 펼쳐진 쪽빛 바다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특히 축제 이틀째 밤에는 동쪽 하늘에서 커다란 보름달까지 둥실 떠올라 휘영청 밝은 빛을 내뿜으며 일대 장관을 연출해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이경현 물치어촌계장은 "무엇보다 올해 처음 도입한 도루묵 그물 뜯기 체험이 좋은 반응을 얻어 만족스럽다"며 "어촌마을의 정취를 담은 체험 위주 프로그램을 늘려 동해안을 대표하는 어촌축제로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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