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머리카락으로 그린 그림으로 우리 역사 증거하고파"

입력 2017-12-11 15:43  

"이웃의 머리카락으로 그린 그림으로 우리 역사 증거하고파"
'광부화가' 황재형, 가나아트 개인전서 머리카락 신작 선보여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굽이치면서 뻗어 나가는 겨울 산맥의 기운이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작품을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장쾌한 산줄기의 정체가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11일 묘한 표정의 기자들에게 황재형(65) 작가가 살짝 타박하듯이 말했다.
"오싹하게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배타적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미 머리카락의 성분인 시스테인은 피자와 비스킷, 햄버거에도 들어 있어요. 우리 우리가 먹기까지 하는 이 시대의 머리카락을 혐오스러워하는 건 아닌 거죠."
강원도 태백에 수십 년간 머무르며 탄광촌의 풍경을 담아오던 '광부 화가'가 '머리카락 박사'로 변했다.
1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황재형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을 물감 삼아, 붓 삼아 완성한 3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작가가 머리카락 작업을 구상한 것이 5년 전, 실제 작업에 나선 것이 2년 전이다. 가족과 친구, 태백 미용실 등에서 얻은 머리카락을 미디움이라는 부드러운 접착제로 캔버스에 하나하나 붙여 작품을 완성한다.
머리카락 뭉치는 무리 진 광부들('볕바라기')이 되기도 하고, 애끊는 마음의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새벽에 홀로 깨어 Ⅱ')가 되기도 하고, 장마철 거리('아직도 가야 할 땅이 남아있는지')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물감을 쓰는 것보다 머리카락을 이용해 작업하는 것이 3배 이상 힘들었다고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눈에 실핏줄이 터지더라. 머리카락 작업을 오래는 못할 것 같다"는 고백에서 그 수고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머리카락 작업을 꾸역꾸역 이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에게 십만 개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는데 한날한시에 태어나거나 죽어가는 법이 없이 독립해 자기 기능을 다 합니다. 평등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평등을 해내지 못한 인간의 몸뚱이에서 그렇게 평등한 머리카락이 자란다는 거죠.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머리카락처럼 왜 살 수 없는 것일까요."
작가는 "삶이 녹아 있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우리 이웃들의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려 우리 실제 역사를 증거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작가는 이야기 끝에 머리카락 작업을 시작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계기를 털어놓았다.
자신도 한때 광부로 살았던 작가는 어느 날 선탄부들의 목욕 장면을 우연히 탄광촌 가설물 틈 사이로 목격하게 됐다. 선탄부는 세상을 뜬 광부 남편을 대신해 석탄을 골라내는 일을 하는 여성을 뜻한다. 씻겨 내려가는 검은 석탄물과 대비되는 인간의 피부, 남편을 잃은 뒤 자기 힘으로 가족과 미래를 지켜내는 여성들의 모습을 좀더 확실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망측스러운 것은 제 호기심이 그렇게 끝나지 않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손이 바르르 떨리더라고요. 그런데 내 양심이 말하더군요, 그렇게까지 보고 그려서 뭐하려고 그러냐고요. 너 기회주의적일 수 있다고요. 결국, 문은 열지 않고 무릎 꿇고 울고 말았어요."
작가는 "지금 이 시간까지 그 부끄러움은 삭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그 부끄러움을 삭혀주고 지워주는 것이 머리카락의 생명성이더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흑연으로 그린 회화 작품들도 일부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28일까지. 문의 ☎ 02-720-1020.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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