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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야스쿠니신사 & 유슈칸

입력 2018-01-10 08:01  

[연합이매진] 야스쿠니신사 & 유슈칸
불편하지만 꼭 가봐야 할 일본 '군국주의 메카'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가깝다고 하면서 먼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2017년 11월의 어느 날 인천공항에서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뒤늦은 여름 휴가를 앞두고 발견한 싼 항공권이 도쿄로 이끈 동인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3시 40분 이륙하는 편이었는데, 20분가량 연발하고도 나리타공항을 거쳐 도쿄 시내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8시를 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하루 생활권이라 할 만했다. 이튿날 시작한 도쿄 탐방의 첫 방문지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로 잡았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꺼림칙한 시설로 여겨 거의 찾지 않는 곳이지만 꼭 둘러보고 싶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나라를 '먼 이웃 나라'로 만들어 놓는 그곳의 실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 '야스쿠니'

신사(진쟈)는 불교가 녹아든 일본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의 예배가 행해지는 곳이다. 가톨릭의 성당, 기독교의 교회, 이슬람의 모스크, 불교의 절과 같은 반열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전역에는 크고 작은 신사가 무려 8만여 개 있는데, 그중 야스쿠니(9만9천㎡)가 가장 크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신사 가운데 야스쿠니가 일본에서 누리는 최고의 위상은 규모보다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덴노(天皇) 중심인 일본 메이지 정부가 출범한 이듬해(1869년) 태동한 야스쿠니는 초혼사(招魂社·쇼콘샤)라는 국가 신사로 출발했다. 초혼사는 덴노로의 권력 이양에 맞선 바쿠후(幕府) 군과 싸우다 숨진 황군(皇軍)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메이지 덴노의 명에 따라 생긴 신사였다. 창건 10년째인 1879년 '나라(國)를 편안(靖)하게 한다'는 뜻인 야스쿠니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신사의 외형상 지위는 국가 종교시설에서 1945년 8월 일제 패망을 계기로 정교분리 원칙에 맞춰 민간시설로 바뀌었다.



야스쿠니에서 가장 가깝다는 도쿄 구단시타(九段下) 역(메트로 한조몬선)에서 내렸다. 야스쿠니는 3개 지하철 노선이 만나는 구단시타역을 비롯해 걸어서 5~10분 거리의 지하철역을 3개(5개 노선)나 끼고 있었다. 한국에선 황제보다 낮은 격인 일왕(日王)으로 불리는 덴노의 거처 '고쿄(皇居)'도 야스쿠니 부근임을 구글 지도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치면 청와대 인근의 조계사나 독립문공원 정도에 야스쿠니가 있는 셈이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야스쿠니의 입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단시타역 계단을 한참 올라 지상 출구를 나서자 세로로 '靖國神社'라 새겨진 돌입간판과 신사를 상징하는 '도리이(鳥居·기둥문)'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스쿠니에는 모두 4개 기둥문이 있는데 제1도리이인 이것이 높이 25m로 일본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제1도리이 앞쪽 길가로 야스쿠니가 2019년(헤이세이 31년) 창건 150주년을 맞는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야스쿠니는 창건 15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펼치는 개보수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찬해 달라는 글을 경내 이곳저곳에 게시해 놓았다.



◇ 신문(神門) 들기 전에 손 씻는 정화의식

첫 도리이를 지나 좌우로 줄지어 선 석등롱(石燈籠)에 눈길을 주다 보니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선 칼 찬 사무라이(무사) 동상(銅像)이 버티고 있다. 근대 일본군대 창설자로 유명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다. 야스쿠니 창건을 이끌기도 했던 그가 야스쿠니 수비대장 역할을 하는 듯했다. 이 동상은 1893년 세워진 일본 내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라는 설명이 눈에 띄었다.
오무라 동상에서 야스쿠니 본당 영역인 배전(拜殿)에 닿으려면 기둥문(제2도리이)을 또 통과한 뒤 신문(神門)과 중문(中門·제3도리이)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야스쿠니에는 '일본 내 최고·최대' 타이틀이 많았는데 제2도리이는 가장 큰 청동제 신사 기둥문이다. 노송나무로 1934년 건립한 신문은 야스쿠니의 정문이다. 1994년 기와 교체를 포함한 복원작업이 이뤄진 신문의 두 문짝에는 일본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직경 1.5m의 황금빛 국화 문장(紋章)이 박혀 있어 야스쿠니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신문 왼편에 '오테미즈샤(大手水舍)'라는 수도(水道)가 보였다. 참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시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참배객이 신문 안쪽으로 발을 딛기 전에 손 씻고 입안을 헹구는 정화의식을 하는 장소였다. 물이 계속 흐르는 화강암 재질의 사각형 수반(水盤)은 무게가 18t가량 나가는데, 재미 일본인들이 1940년 기증했다고 한다.

◇ 배전 앞에서 만난 '이달의 유언' 게시판



배전 앞의 중문(제3도리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왼쪽으로 '유언(遺言)'이란 글귀를 내건 게시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게시판 앞에는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게시 내용을 영문과 일어로 적어 놓은 인쇄물이 비치돼 있다. 유언 내용을 훑어보니 1944년 11월 일제(日帝) 침략지인 중국에서 전사한 33세 군인이 죽기 5개월 전 남긴 유언이다.
게시판 앞에 선 참배객들은 '대명(천황의 명령)에 따라 용맹스럽게 먼 곳에서 싸우고 있으니 행복하게 살라'고 아내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글귀에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야스쿠니는 과거 침략전쟁에 동원했던 전몰자들의 '애국충정'이 담긴 유언 가운데 '이달의 유언'을 달마다 골라 참배객들이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북돋는 내용이지만 일제 침략으로 고통받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선 공분을 일으킬 일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밀어내면서 배전 쪽으로 다가갔다. 배전은 총리 등 일본 정부 고위 인사나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언론매체에 등장해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국화 문양이 들어간 노렌(칸막이 천)을 쳐 놓은 모습이 눈에 익었다. 배전은 말 그대로 절하는 곳으로, 일반 방문객들은 대개 이곳에서 참배를 마치는 듯했다.



참배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니 먼저 가볍게 한 차례 목례한 뒤 두 차례 반절을 한다. 그리고 가슴 높이에서 양손을 모은 뒤 오른손 끝을 왼손바닥 아래쪽으로 살짝 끌어내리고서 두 차례 손뼉을 쳤다. 다시 한 차례 반절한 뒤 가벼운 목례를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모든 참배객의 동작이 한결같아 참배법을 부단하게 익힌 게 아닌가 싶었다.
배전 뒤로 두 채의 건물이 있는데, 옆쪽 너머로 살짝 지붕만 보이는 것이 본전(本殿), 그 뒤로 숨어 있는 건물이 영새부봉안전(靈璽簿奉安殿)이었다. 영새부봉안전은 야스쿠니가 매일 제사로 받드는 모든 영령의 명부가 안치된 곳이다. 영령 이름을 적은 영새부는 일본 전통 수제종이라고 한다. 그 두 곳이 어떤 의미의 장소인지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걸 느꼈다.

◇ 봉안 영령 246만6천…조선인도 2만1천 位

본전 참배는 참집전(參集殿)에서 별도 신청하게 돼 있어 관광객이 본전 안을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본전으로 통하는 참집전 앞에는 영어, 중국어 외에 한글로 '견학하는 장소가 아닙니다'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본전 참배객은 한 사람당 2천 엔(약 2만원) 이상의 공물료(玉串料)를 내게 돼 있다.
본전은 야스쿠니의 신(神)들로 불리는 총 246만6천 위(位)가 봉안된 바로 그곳이다. 영령(英靈)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는 정한파(征韓派)이자 광기의 사상가로 이름을 날렸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 일본 메이지 유신(1868년)의 기틀을 잡은 주역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영령의 주류는 덴노(天皇) 중심의 정치체제를 재건한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日帝)가 일으켰던 침략전쟁에 동원돼 숨진 이들이다.
특히 전체 봉안 영령의 90%에 가까운 213만3천 위는 일본이 대동아(大東亞)전쟁이라 부르는 태평양전쟁(1941년 12월~1945년 8월)과 연관돼 있다. 일제 패망 후 도쿄 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7명을 비롯해 태평양전쟁을 이끌었던 A급 전범 14명도 1978년 합사(合祀) 의식을 거쳐 야스쿠니의 신이 됐다.
일제의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징용됐다가 목숨을 잃은 조선인 출신 2만1천181위와 대만인 2만7천864위도 본인이나 유족의 뜻과 무관하게 야스쿠니에 봉안돼 됐다. 야스쿠니에서 일본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이들 영혼이 이제껏 안식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울감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 군국주의 가르치는 전쟁박물관 '유슈칸'





배전 앞에서 오른쪽으로 몇 걸음을 가면 왼편에 본전으로 이어지는 참집전, 오른편에 무대와 객석마당을 갖춘 능악당(能樂堂) 사이에 있게 된다. 능악당은 영령들을 기리는 일본 전통춤과 연극 같은 공연이 수시로 펼쳐지는 곳이다.
야스쿠니 경내에는 일제 침략전쟁 와중에 숨진 이들을 호국의 신으로 떠받드는 종교시설 말고도 눈여겨볼 것이 많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능악당 마당에 붙어 있는 유슈칸(遊就館)이었다. 야스쿠니에 비해 유슈칸은 일제 침략을 받았던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주는 데였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고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야스쿠니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제가 주도한 여러 전란 중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면 유슈칸은 그들이 남긴 유서와 유품 등을 보여주면서 군국주의 정신을 선전하는 일종의 전쟁박물관이었다. 야스쿠니신사보다 13년 늦은 1882년 최초 개관했다는 유슈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썼던 무기류를 포함해 총 10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안내책자에 유슈칸이란 이름은 중국 고전인 '순자' 권학편의 '유필취사(遊必就士)'에서 따왔다는 설명이 있었다. 이는 '교유(交遊·사귀며 놀기)할 때 반드시 어진 사람(士)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일제의 수많은 침략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선인'들을 만나 '국가를 위해 몸 바치는 정신을 배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전범재판 정당성 부인하는 놀라운 기록영화



지상 2층 규모로 개축된 유슈칸은 전시공간인 현관홀(1층), 19개 일반실(1~2층), 특별실(2층), 대(大)전시실(1층), 기획전시실과 2개 상영실(2층)을 갖추고 있다. 부대시설로 매점과 커피숍이 함께 있는 현관홀만 무료 관람이고 다른 곳은 어른 기준으로 800엔(약 8천원)을 내야 볼 수 있다.
유리정문을 밀고 들어가 자동발권기에서 표 한 장을 사고 보니 바로 현관 전시홀이었다. 현관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자살) 공격에 투입된 제로센(零式)전투기, 미군과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용됐던 150㎜ 대포, 일제 식민지인 타이멘(타이~미얀마) 철도를 달렸던 C56형31호 기관차 등 대형 전시(戰時) 유물 몇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항공모함을 비롯해 어뢰 조종자가 함께 돌진한 뒤 자폭해 인간어뢰로 불렸던 가이텐(回天), 로켓특공기 오우카(櫻花), 함상폭격기 스이세이(彗星) 등 대부분의 중요한 대형 전시물들은 유료 영역인 대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본격적인 내부 관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유료공간인 2층으로 올라가면서 시작한다.



2층에서 관람객을 제일 먼저 맞는 전시품은 철모를 쓴 '병사의 상(兵士の像)'이다. 2층의 제1전시실로 연결되는 복도에는 이것 말고도 큼지막한 철제포신 2개와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부상병의 경례' 등 다른 조각품이 여럿 전시돼 있다.



1전시실 입구 오른쪽으로는 2개 영상홀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연중 이어지는 야스쿠니의 다양한 제례를 소개하는 1홀을 건너뛰고 2홀에서 상영되는 '우리는 잊지 않는다(私たちは 忘れない)'라는 다큐멘터리를 잠깐 관람했다. 50분 분량으로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오전 10시부터 하루 6차례 매시 정각 틀어줘 방문객들이 편하게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비장한 목소리의 여성 내레이터가 남성 해설자와 함께 일제 군가 등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메시지를 전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또 한 번의 충격을 줬다. 야스쿠니신사가 후원하고 '일본회의와 영령에 응답하는 모임'이 기획하고 제작했다는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종전 후 연합국 주도로 열린 전범재판의 정당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일색이었다.

「지금 야스쿠니신사에는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포함해 전범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은 1천 명이 넘는 분들이 '쇼와 순난자(昭和 殉難者)'로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주권을 회복했을 때 정부와 국회가 전범으로 죽은 분들을 범죄인으로 보지 않고 전쟁이란 '공무' 중 사망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복수(復讐)의 의식이었다고 불리는 전범재판이 일본 안에서도 열려 많은 군인과 군속(군무원)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소위 B급, C급 전범이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상은 이처럼 전쟁 범죄자들을 국가영웅으로 미화하는 차원을 넘어 일본을 위해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의 많은 젊은이가 입대해 '대동아전쟁'을 함께 치렀다며 강제징용을 사실상의 자원입대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야스쿠니에 한국(조선) 국적 영령이 2만1천181위 봉안돼 있다는 자막을 띄우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가 잊지 않겠다면서 거듭 강조하는 핵심은 야스쿠니의 신들이 지금까지 일본을 지켜왔고, 그들이 기초를 다져놓은 일본 문화와 영광(ほこり)을 키워가겠다는 것이었다.

◇ 일본이 한국 독립을 염원했다?

한층 더 우울한 기분을 안고 제1전시실로 들어섰다.
유슈칸은 현관홀·대전시실·특별전시실·기획전시실을 제외한 19개 일반 전시공간을 '프롤로그 존(1~2실)', '근대사를 배우는 존(3~15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된 244만6천 위 가운데 약 1만 위의 영정사진과 유언, 방명록을 전시한 '영령의 뜻을 느끼는 존(16~19실)' 등 3개 영역으로 구분해 운영했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일본 무(武)의 역사를 보여주는 프롤로그 존에선 메이지 덴노가 육·해군 대장에게 하사했다는 장검인 원수도(元帥刀)가 시선을 끈다.
이어지는 '근대사를 배우는 존(Zone)'에서는 일본이 바쿠후(幕府) 체제에서 벗어나 덴노 중심으로 본격적인 근대화에 돌입한 메이지 유신 때부터 태평양전쟁(유슈칸 전시물에는 모두 대동아전쟁으로 표기됨) 종전(1945년) 무렵까지 약 78년 동안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일본 극우적 사관에 맞춘 기술(記述)과 관련 유물들을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



한국(조선)에 관한 내용은 청일전쟁을 취급한 제6전시실과 러일전쟁부터 만주사변까지를 다룬 제8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청일전쟁 전후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두 나라가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과 1910년의 한일병합사건이 눈길을 끌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 부분 기술이 가관이었다. 일어와 영어로 기술돼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 독립은 확실한 일이 되어 우리나라(일본)는 오랜 염원을 이루었다(일어).」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한국은 독립국이 되었고, 이는 일본이 오랫동안 바라던 바였다(영어).」

◇ 유슈칸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한일병합 부분에는 러일전쟁에서 병합까지의 주요 사건 일지와 경과를 간략히 써 놓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조선통감, 조선총독부 건물 전경, 병합조약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 그리고 병합을 주도해 만고의 역적으로 불리는 이완용 총리대신의 사진을 나란히 전시했다. 그런데 일지 난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이름이 있었다.



「메이지 42년(1909)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암살되다.」

한일병합조약의 강제성을 감추는 등 역사를 소설처럼 써 놓은 가운데서 그나마 안중근 의사를 '한국의 독립운동가'라고 적어 놓은 걸 보니 조금은 울화가 풀리는 듯했다. '암살'이란 단어가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몰자 영령을 야스쿠니 본전에 봉안하는 초혼재정(招魂齋庭) 의식을 재현해 놓은 9전시실과 중일전쟁을 다룬 10전시실을 끝으로 2층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유슈칸은 1층 전시실 입구부터 차례로 위치한 다섯 개(11~15) 전시실을 활용해 '대동아전쟁'이란 타이틀로 태평양전쟁을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침략'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해 벌인 전쟁상황을 설명하면서 주로 쓴 단어를 보면 일어로는 '사쿠센(작전)·고랴쿠(공략)', 영어로는 작전이라는 뜻인 '오퍼레이션(Operation)'이나 '캠페인(Campaign)'이었다. 유슈칸에서만큼은 일제의 침략전쟁 역사가 없는 셈이다.



반인도적인 침략전쟁 역사를 미화한 극치는 '근대사를 배우는 존(3~15실)'의 마지막 방(제15실·태평양전쟁 5)에서 마주했다. 이곳에서는 한쪽 벽면에 '종전:일본 재건의 길'이라는 타이틀로 일제의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 과정,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발표 관련 내용을 연대순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1952년 4월 연합국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다른 쪽 벽면에는 태평양전쟁 때 전시내각을 이끈 도조 히데키 당시 총리를 비롯해 A급 전범으로 처형된 전쟁 지휘부 7명의 사진을 일장기와 함께 걸어놓고 있다. 이들의 사진 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 과정에서 11개국의 판사 중 유일하게 무죄를 주장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 비노드 팔(1886~1967)의 더 큰 사진이 걸려 있다. 전범들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듯한 이런 태도는 전범 혐의자들에 대한 단죄를 지금까지 멈추지 않으면서 옛 나치당 상징인 십자표지(卍)조차 국민의 머릿속에서 지워내려고 노력하는 독일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 끊임없이 펼쳐지는 엉터리 역사 보여주기

유슈칸을 둘러보면서 점입가경이란 말이 정말로 실감 났다. 15전시실과 16전시실을 이어주는 휴게공간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자살공격조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 동상과 이들의 출격 장면을 표현한 부조(浮彫) 작품이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의 추모비에 적힌 내용은 더욱 가관이었다.



「우리나라(일본)가 존망을 건 대동아전쟁에서 일말의 생환을 기대하지 않았던 특공작전이 결행됐다. 17~18세부터 30대까지의 젊은 용사들이 하늘로, 바다로, 육지로 육탄공격을 감행해 위대한 전과를 올리고 산화했다. 그 수가 대략 6천 명. 장렬하기 그지없는 이 공격은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국민은 다 함께 그 순수한 충의에 감읍했다. 특별공격대의 전투는 지고지순한 애국심의 발로로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또 세계인들에게 강한 감명을 주어 일본의 영원한 평화와 발전의 초석이 되고 있다. 애석한 마음을 담아 특별공격대 관련 모든 사료를 유슈칸에 바쳐 그 정신과 위업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유슈칸에서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엉터리 역사기술에 가슴이 막히는 듯했다. '야스쿠니의 神들'이란 4개(16~19) 전시실로 이뤄진 '영령의 뜻을 느끼는 존'을 총총히 빠져나와 유슈칸 앞마당에 섰다. 푸른 하늘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웬걸! 라다 비노드 팔을 극찬하는 칭송비(현창비)가 또 눈에 들어왔다. 비석 앞에는 그가 주장했던 궤변적 의견과 칭송의 글이 담긴 인쇄물이 누구나 열 수 있는 유리박스 안에 잔뜩 쌓여 있었다.



「팔 박사는 소위 도쿄재판이 승리로 오만해진 연합국이 무력화된 패전국 일본에 대해 야만적인 복수의 의식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파하면서 사실오인투성이인 연합국의 소추에 법적 근거가 완전히 결여돼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피고단에 대해 전원 무죄로 판결하는 의견서를 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 연합국의 복수열과 역사적 편견이 가라앉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팔 박사의 의견은 문명 세계의 국제 법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법의 정의와 역사의 도리 등을 끝까지 지킨 팔 박사의 용기와 정열을 알리면서 그의 말을 일본 국민에 대한 귀중한 유훈으로 명심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워 박사의 위업을 천고에 전하고자 합니다. 2005년 6월 25일 야스쿠니 궁사(宮司) 난부 도시아키」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허위이거나 과장 기술된 내용이 드러났다. 우선 칭송비에 적힌 것과 달리 주로 세법 분야에서 일했던 팔 판사는 국제법 전문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유슈칸 측은 외국인을 상대로 노골적으로 거짓말하기가 거북했는지 이 부분의 일어와 영어 설명을 다르게 표현해 놓았다. 내국인(일본인)이 접하는 일어 비문에는 11개국 재판관 중 '유일한 국제법 전문판사(唯一人の國際法專門の判事)'라고 썼지만 이를 영어로 번역한 인쇄물에는 '국제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가장 뛰어났다(the most outstanding in his erudition of international law)'라고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다.



야스쿠니와 유슈칸 어디를 둘러봐도 아시아권에 참화와 고통을 뿌렸던 일제 만행에 대해 참회나 사죄, 반성의 뜻을 나타내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뒷간에서 낚시질하건 말건 상관하지 말라'는 태도다.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자주 오다 보면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참혹한 역사를 쓰게 한 일제의 야만적 침략전쟁이 아름다운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고 믿는 쪽으로 세뇌당할 것 같았다. 일제가 자행한 침략전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일본 사회 전체에 걸친 보편적 현상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다. 만일 그렇다면 일본 내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부활 조짐을 보이는 신(新)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의 '내가 가본 그곳'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parks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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