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다문화 국가' 고려 건국 1100주년

입력 2018-01-02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다문화 국가' 고려 건국 1100주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우리나라의 영문 국호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고려가 건국된 지 올해로 1천100주년을 맞았다. '차이나'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나라에서 비롯됐고 '재팬(Japan)은 일본(日本)의 당나라 때 발음 '지펀'이 변한 것이다. 13세기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지팡구'(Zipangu)라고 불렀다. 서양에서 한국을 코리아, 코레아, 꼬레 등으로 부르는 것은 고려시대 들어 비로소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고려는 국호만 세계에 알린 게 아니다. 고려청자, 고려대장경,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됐다.

고려는 한국사에서 최초의 글로벌 국가일 뿐 아니라 다문화 국가이기도 했다. 외국인을 받아들인 기록이 사료에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실제로도 이민족을 적극 포용해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풍요로운 문화를 일궜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발흥에 따른 외침과 중국 왕조 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후삼국을 병합해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를 연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한 뒤 935년과 936년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아우른다. 그에 앞서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과 함께 세운 발해가 926년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망국 백성이 대거 고려로 이주한다. 고려사는 934년에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투항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로도 거란족과 여진족이 각각 요(遼)나라와 금(金)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귀화하는 북방민족의 발길이 이어진다. 8대 임금 현종 때인 1017년 말갈족 목사(木史)가 부락민을 거느리고 귀순해 작위를 내렸으며 거란족 매슬(買瑟) 등 14명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건국 후 요·금 교체기인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간 17만 명가량의 이민족이 고려로 이주했다, 이는 당시 추정 인구 200만 명의 8.5%로, 지금의 국내 체류 외국인 비율 3.9%보다 훨씬 높다. 가장 많은 것은 38회에 걸쳐 12만2천686명이 이주한 발해계로 73%에 이르고 다음은 여진계 4만4천226명이었다. 정복민인 거란계도 1천432명이었으며, 5대10국과 송(宋)나라 한족(漢族)은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귀화인은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4대 왕 광종은 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 과거제를 실시해 호족 세력을 누르고 전국의 인재를 고루 발탁했다. 중국 5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관리이던 쌍기는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일행과 함께 돌아가지 못했다. 그를 불러 대화해본 뒤 식견에 감탄한 광종은 후주에 사신을 보내 쌍기를 신하로 삼고 싶다고 요청하고 곁에 두었다. 과거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1천 년 가까이 관료제의 근간이 됐다. 쌍기가 중용되자 아버지 쌍철도 요즘 말로 하면 '초청 이민'으로 들어와 벼슬을 받았다. 공민왕 때 귀화해 청해 이씨라는 성과 본관을 받은 여진족 퉁두란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1등공신이 됐다.

이주민은 남방과 서역에서도 들어왔다. 고려가요 '쌍화점' 가사에 '만둣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회회아비는 이슬람 계통의 상인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수도 개성의 외항이던 예성강 하구 벽란도는 중국·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아라비아 상인까지 북적거리는 국제도시였다. 베트남 리 왕조의 마지막 왕자 리롱뜨엉(이용상)은 1226년 쩐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로 망명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보다 100여 년 앞서 리 왕조의 왕자 리즈엉꼰(이양혼)도 중국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건너와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됐다고 전한다.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시종으로 1274년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 삼가는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벼슬과 봉토를 받고 장순룡으로 개명했다. 덕수 장씨는 그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함께 왔다가 눌러앉아 인후로 이름을 바꾼 몽골인 훌라타이는 연안 인씨의 시조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원나라 황제의 딸들이 결혼이주여성으로 들어와 왕비가 되다 보니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잇따라 왕으로 등극한다. 원종의 맏아들인 25대 충렬왕은 부인과 장성한 아들을 두었으나 38세의 나이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해 쿠빌라이 황제의 사위가 됐다. 둘 사이에 태어난 '혼혈왕자'가 충선왕이다. 몽골계 혈통의 비율을 따지면 충선왕 50%, 충숙왕 75%, 충혜왕 37.5%, 충목왕 68.75%, 충정왕 18.75%, 공민왕 37.5%, 우왕 18.75%이다.

몽골은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과 중동에 이르는 인류 초유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동서양 물자와 인력의 교류가 활발해 우리나라에도 서역인이 적지 않게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중국에 명나라가 들어서고 한반도에는 조선으로 교체되면서 우리나라 외교와 무역은 중국과의 사대 외교와 조공 무역으로 축소된다.


최근 이주민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성씨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성씨는 275개를 헤아린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0개가 귀화 성씨이고 신라 때 40개, 고려시대 60개, 조선시대 30개 정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교통이 발달한 것을 감안하면 고려에 비해 조선이 훨씬 폐쇄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는 고려 역대 왕들의 국정 철학이었다.

전국의 13개 국립박물관은 지난해 12월 제주박물관을 시작으로 4월 공주, 5월 부여, 6월 공주를 거쳐 12월 서울의 중앙박물관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 맞는 주제로 1년 내내 고려 건국 1천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한다. 새해를 맞아 고려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감상하며 고려의 개방 정책과 포용 정신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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